“너무 높지 않게 날아서”
익숙하지만 소진되지 않은 묘한 캐릭터 ‘흰둥이’와 함께 인생의 높낮이 조절
동그란 얼굴에 두 가닥 머리카락, 그리고 코가 없는 앙증맞은 눈과 입. 몸 전체에서 얼굴의 크기가 절반을 넘기는 캐릭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흰둥이’에 대한 소개다. 페리테일의 2002년 첫 책 《포엠툰》에 등장한 이후로 20년이 넘도록 작가의 ‘귀여운 페르소나’로 활동 중이다. 보장된 월급이 없는 프리랜서 웹툰 작가로 장수한 비결 중 하나로, 페리테일은 “너무 높지 않게 날아서”라고 답한다. 익숙하지만 완전히 네임드는 아닌 흰둥이, 간간이 팔리는데 또 그렇게 많이 팔렸는지 모르는 묘한 위치에 있는 캐릭터와 그림들. 작가는 데뷔 초에 ‘조금 붕 뜬 상태’를 경험한 후에는 지금까지 지치지 않게 작업하는 ‘셀프 보호주의’ 작업 방식을 터득했다고 한다.
이 책에 나오는 60개의 이야기는 대부분 잔잔하게 와 닿는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다. 넉넉지 않은 집안 환경, 평생 앓아온 극심한 아토피, 눈 수술(인공수정체를 흰자에 묶어 고정하는), 거절당하는 작가로서의 삶, 당장 망할 것 같은 불안감 등 이야기를 채우는 소재는 불행과 잔인함에 가까운 ‘신세 한탄용’ 모음집이다. 20여 년 차 웹툰 작가의 내공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잔인함의 편린들이 모였는데 왠지 따스하다. ‘인생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능력!’ 덕분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너무 높게 날지 않아서 떨어져도 죽을 만큼 다치지 않았고, 낮게 나는 대신 최대한 힘을 쓰지 않고, 딱 쓸 만큼만 써서 빨리 지치지 않았다”며 또 다른 형태의 ‘갓생’을 보여준다. 20년 살아남은 창작자 페리테일의 일상 이야기는 “삶이란 우리의 인생 앞에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존 호머 밀스)라는 말을 건네는 듯하다.
“당신의 하루는 귀여운가요?”
소박하고 귀여운 하루는 매일매일 ‘기분 좋은 온도’를 발견하는 것
형용사 ‘귀엽다’는 ‘예쁘고 곱거나 또는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 동물, 식물, 사물 등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 없이 라벨링되는 ‘귀엽다’는 말은 허용 범위가 넓은 ‘포근한 단어’다. 《귀여운 거 그려서 20년 살아남았습니다》에서 ‘귀여운 거’는 페리테일의 20년 동반 캐릭터 ‘흰둥이’와 길냥이에서 반려묘로 5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한 ‘오랑이’ 그리고 흰둥이와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손재주가 뛰어난 ‘보라요정’이 한데 어울려 소박한 하루에서 발견한 ‘귀여운 눈빛, 귀여운 커피 맛, 귀여운 빵 모양, 귀여운 발자국…’ 등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마냥 낙관적이고 희망찬 메시지와 ‘귀요미’ 소품들로만 채운 것은 아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쓴맛을 구별하는 법, 세상과 적절하게 공명하는 법을 알게 된 후에 얻은 전리품 같은 ‘귀여움’이라 가볍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책 속에 가득 채워진 그림과 사진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기분 좋은 묵직한 온도에 동기화가 된다.
어쩌면 상처와 분노로 채워진 누군가의 하루를 따스하게 안아주는 것은 ‘귀여움’일지도 모른다고 저자 페리테일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