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학파 자연학의 특징적 요소
성호학파 자연학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추출할 수 있다. 첫째,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명물도수지학’을 비롯한 자연학 분야를 유자(儒者)의 필수적 학문, 즉 유자의 실학(實學)으로 파악하였다. 둘째, 물리(物理)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기초하여 학문적 탐구 대상을 자연물로 확장하였다. 물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기존의 세계관과 인식론의 변화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공부의 대상과 방법에도 일단의 변화를 불러왔다. ‘격물치지론’의 재해석에 따라 자연법칙으로서의 물리에 대한 탐구가 적극적으로 모색되었고, 격물의 대상 역시 유교의 경전(經傳)에서 벗어나 자연물로 확장되었다. 그것은 천지만물을 포괄하는 박학적(博學的) 성격을 띠게 되었다. 셋째, 학문방법론의 일환으로서 ‘수학(數學)과 실측(實測)’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등장하였다.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당대 천문역산학(天文曆算學)의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방안으로 수학의 필요성과 함께 실측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그 연장선에서 실측을 위한 기구로서 천문의기(天文儀器)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 그들은 기존의 주자학적 자연학의 논리적 문제점을 ‘실측’과 ‘실증(實證)’의 차원에서 지적하였고, 그와는 다른 새로운 자연학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대한 연회는 다시 만나기 어렵다[盛筵難再].”
뛰어난 글재주를 지녔던 왕발(王勃)은 20대 초에 그 유명한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었다. 그 가운데 “아, 명승지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요, 성대한 연회는 다시 만나기 어렵다[嗚呼, 勝地不常, 盛筵難再]”라는 대목이 있다. 정약용은 권철신(權哲身)의 묘지명을 지으면서 정조 3년(1779) 겨울의 이른바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士) 강학회’를 회상하면서 이 대목을 거론하였다. 그것은 비단 주어사 강학회와 같은 성대한 학술 모임이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토로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권철신은 이기양(李基讓)과 함께 장래의 성호학파를 이끌어갈 인재로 일찍부터 선배들이 기대해 마지 않았던 학자였다. 그러나 권철신과 이기양은 천주교 신앙 문제에 발목이 잡혀 선진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정약용이 “그 또한 신유년(辛酉年: 1801) 봄에 죽으니 드디어 학맥(學脈)이 단절되어 성호의 문하에 다시 그 아름다움을 이을 만한 이가 없게 되었으니, 이 세운(世運)은 다만 한 집안의 슬픔이 아니었다”고 한 것은 권철신의 죽음에 따른 성호학파의 조락(凋落)을 묘사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성호학파의 학맥은 안정복(安鼎福)-황덕길(黃德吉)-허전(許傳)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통해 전승되었으며 일련의 보수화 과정을 거쳤다. 자연학의 측면에서 보면 성호학파의 관련 논의는 이전의 참신성을 잃고 선배들의 담론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창조적 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은 일종의 굴절(屈折) 내지 변주의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