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독립운동가 "김준엽"과
인기 다큐멘터리 작가 "윤영수"의 만남
김준엽 선생은 1987년 펴낸 〈장정〉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20대를 중국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지냈다. 이때의 경험은 내 인생을 지배하는 길잡이가 되었기에 항상 그 무렵을 회상하고, 또 그때 세운 인생의 지침을 내가 옳게 지키고 있는지 반성하면서 살고 있다.”
80년 전의 장정(長征)길을 되짚으며 이 책을 쓴 윤영수 작가는 이 사회에 어떤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려는 의도보다 오히려 글을 쓰는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선생께서 대장정을 감행했던 스물두 살의 모습과 같은 나이의 내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때의 목표로부터 지금 자신은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확인해 보고픈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선생에 대한 존경심에서 〈장정〉길 답사를 기획했는데 답사 내내 후회와 회한이 밀려와 답사 후에는 아쉬움만 남았다고 실토합니다.
선생은 생존해 계시면서 한 번도 소신과 신념을 훼절한 적이 없습니다. 두 번이나 총리직 제의를 받았으나 단호하게 이를 번번이 고사했고, 고려대 총장 재직 시절에는 군부독재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총장직을 과감히 던졌습니다. 당시 졸업식장에서 벌어진 ‘총장 사퇴 결사반대’는 아직도 신화처럼 미담으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특히 ‘역사의 발전’을 강조하는 선생께서는, 우리 현대사에 독립 운동사를 주류로 앉히지 않는다면 민족사가 올바로 정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독립 운동사를 들여다보면 일제의 침략과 함께 그들의 온갖 만행이 드러나는데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따르지 않는다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라는 점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1부〉 탈출
1부 탈출에서는 청년 준엽의 어린 시절과 독립군이 되기 위해 입대를 하는 여정이 소개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1월, 준엽은 고양 강계를 떠나 기차를 타고 다른 학도병들과 같이 평양에 도착합니다. 당시 준엽은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해 중국군에 합류할 계획을 세우며 중국어 교본과 지도, 나침반과 아버지의 유품인 단검을 몰래 챙겼다고 회고했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일본군 학도병으로 나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일본군 장교가 되어 금의환향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내몰며 사상교육을 했고, 학도병들은 나라가 망하고도 10년이나 지나서야 태어난 세대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때였습니다. 기초 훈련을 받은 준엽은 중국의 ‘수양’이라는 곳에 도착해 ‘츠카다’ 부대에 배정받습니다. 준엽은 한밤중에 탈출해 중국 국민군에게 합류해 독립 투쟁을 시작합니다. 그는 중국 국민군과 독립 투쟁을 하면서도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길 원했고, 중국 국민군의 허락을 받아 쉬저우에서 충칭의 임시정부까지 2,400km(6천 리)의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윤영수 작가는 이 여정을 시작하며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준엽의 대장정을 소화할 수 있을지, 장정 길에 담긴 준엽의 뜻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지 염려하며 출국합니다.
〈2부〉 대장정
2부 대장정에서는 본격적으로 준엽과 그의 동지들이 중국 내륙을 가로질러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투쟁의 여정이 그려집니다. 처음 합류했던 국민군 부대를 떠난 준엽과 일행은 대륙의 다른 국민군 부대들을 만나게 됩니다. 일본군이 지키고 있는 철도를 넘고 철조망을 건너 중국군 유격대에 도착한 준엽은 적잖이 실망하게 됩니다. 쉬저우의 국민군과는 달리 국민군 유격대원들은 무지했고 강제로 군대에 끌려와 사기 또한 몹시 낮았다고 준엽은 말했습니다. 또한, 장교들의 부패로 인해 병사들은 몇 달간 채소죽만 먹고 견디기 일쑤였다고 밝혔습니다.
준엽은 탈출 학도병인 장준하, 윤경빈, 홍석훈, 김경록과 함께 이런 형편없는 수준을 가진 유격대의 호송을 받으며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중국인 의인들을 만나 도움도 받고, 길 안내도 받았으나 그들의 여정은 정말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이후 안후이성에 도착한 준엽 일행은 중국군 정규군과 만나 여독을 풀고, 린취안을 향해 이동합니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 대원들과 만나게 되는데, 후에 장준하 선생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 나오는 80여 명의 한광반 대원들을 보며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고 술회했습니다.
준엽은 린취안에서 다른 한광반 대원들과 같이 훈련에 참여했으나, 이내 중국군이 관장하는 교육 훈련 내용에 실망해 자구책으로 교양 학습을 시작합니다. 일행은 각자의 전공을 살려 강연회를 열었고, 강연 노트를 모아 잡지를 발행했습니다. 잡지의 표지로 쓸 재료가 없어, 준엽의 팬티로 표지를 만들었습니다. 준엽과 동지들은 한광반 졸업식이 가까워지자, 연극을 만들기도 했는데, ‘광명의 길’이라고 이름을 붙인 그들의 연극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중국 간부들 또한 그들의 연극에 감동하고, 지방 정부 또한 적극적으로 지원해 모금 활동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준엽과 동지들은 이런 식으로 훈련과 활동을 반복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을 향한 여정을 계속했습니다. 저자는 열차를 타고 중국의 대평원을 바라보다 1944년 준엽 일행의 여정에 대해 깊은 사색에 빠집니다. 도대체 그 무엇이 젊은 준엽과 일행을 이 대지로 내몰았을까? 아직도 시퍼런 청춘들이 목숨을 걸겠다고 나선 까닭이 무엇일까? 나라를 되찾겠다고?
〈3부〉 한국광복군
3부 한국광복군에서는 준엽 일행이 여정을 마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한 이후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담습니다. 준엽 일행은 마침내 대장정을 끝내고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합니다. 무려 8일 동안이나 배를 타고 양쯔강을 건너 임시정부에 도달합니다. 그 당시 일제에 맞서 싸워 조국광복을 이뤄낼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 한국광복군을 창설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여러 어른을 만나게 됩니다.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부터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까지 준엽이 평소 존경하던 인물들과 감동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한국 젊은이들이 모두 일본인이 되어있지 않을까 우려하던 김구와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장준하 선생의 선언문 낭독에 감동해 울음을 터트리고 맙니다. 임정 요인들은 그들 스스로 투쟁을 통해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국의 독립을 이룩하려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들 중에는 대한민국으로 귀국하던 중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광복군의 생활은 의미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준엽과 동지들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미군들과 같이 훈련했으며, 아내인 민영주와의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열심히 훈련하고 공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실행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며 서울 진공 작전은 무위로 돌아갔으나, 준엽과 동지들의 노력이 완전히 헛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독립 후 수송기를 타고 2년 만에 국내로 복귀한 준엽은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 학문을 닦습니다. 그리고 1949년부터 고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평생 학자의 길을 걷습니다.
저자는 열흘간의 여정을 끝내고 귀국합니다. 답사기 마무리 작업을 위해 대전 현충원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곳에서 총장님의 졸업식 고별사 모습을 떠올린 저자는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이 김준엽 총장이 바랐을 모습인가” 반문하지만, “역사는 반드시 발전한다”는 총장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글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