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몰랐기에 맞이한 근대 중국의 위기,
장지동의 진단
근대 사회로 변화하면서, 중국은 왜 서양 열강에 뒤처지고, 중국의 학문은 위기에 대응하지 못해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일까. 장지동은 중국이 여러 왕조를 거치며 하나로 통합된 이후 주변에 중국을 능가할 만한 경쟁 상대가 없으니, 문사 치장만을 중시하여 실력이 없어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은 지식의 개발이나 개혁을 하지 않고 옛 법을 그대로 지키며 간혹 수정하고 정돈해도 위기 없이 안심하고 유지할 수 있었으니 학문이 점차 쇠퇴했다. 그리고 아는 것이 없으니 할 일이 없으며, 하찮고 시시하게 일을 처리하여 졸렬하고 쓸모없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중국이 인재가 넘쳐나던 때는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같이 경쟁이 상존하던 때였다. 경쟁이 인재를 키우고 지식을 개발하는 원천인데, 대일통(大一統)을 이룬 이후 주변에 경쟁할 만한 국가가 없던 중국은 안일하게 대처하며 지식을 개발하지 않았다고 장지동은 주장했다.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교육받은 인재의 힘
그는 군중의 힘을 신뢰하기보다는 국가만이 이해 갈등을 통제하고 공적인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군중의 이익 다툼과 이기적 활동을 막을 대안을 국가에 대한 신뢰로 연결시켰다. 또한 국가가 국난을 극복하는 핵심은 인재의 유무라고 파악했고, 사대부가 국가 개혁의 중심에 설 것을 요구했다. 사대부가 사적 이익을 넘어 국가의 공익을 추구하는 개혁을 담당할 적임자였다.
장지동은 중국 학문이라는 문화적 가치를 강조했고, 이 외에도 신문, 철도 등을 통해 중국인의 국민 의식 강화를 추구했다. 그가 강조한 신문 열람은 견문을 넓히고 기개를 양성하며 불명확한 논설을 없애 식견이 좁은 선비, 들판의 농부 모두가 중국에 관한 소식을 보며 중국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장지동의 계묘학제,
중국 근대 교육체계를 56개 조문으로 만나다
1904년, 장지동은 1902년의 학제를 수정하여 새로운 학제를 만들었다. 이를 만들 때 영경, 장백희 두 명의 관학대신과 상의했다고 하나, 실상은 장지동 혼자 주도한 것이었다. 이것이 속칭 계묘학제로서, 1904년 1월 13일 발표하고 청 말까지 사용했다. 계묘학제는 22개의 장정으로 구체화되어 있었고, ‘학무강요’도 그중 하나로서 총 56개의 조문으로 구성되었다.
계묘학제는 사립학교에 대한 엄격한 통제, 여성교육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초등에서 대학까지의 교육기간이 너무 긴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청 말까지 실제 운영된 학제이자 학교체계와 행정의 분리, 사범교육과 실업교육의 중시 등 중국교육제도의 근간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를 살펴봄으로써 장지동이 주장한 중국 근대교육제도의 구체적인 실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