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기쁨의 비평으로 그러모은
문학적 생애의 궤적들
『비평의 숙명』의 책임 편집은 홍정선과 문학적ㆍ인간적으로 연이 깊은 문학평론가 정과리가 맡았다. 정과리는 홍정선의 작고 후 “마지막 친구를 잃었다는 생각이 처절한 실감이 되어” “가슴이 뜯겨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나에게는 이제 그를 냉정하게 복기하는 일만 남았다. 그것만이 우리의 우정의 의미를 밝혀줄 것”(「정선 형, 이건 애도가 아니라 곡성이구려」, 『문학과사회』 2022년 겨울호)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에 그는 단순히 유고를 모으고 정리하는 데에서 나아가, 책머리의 글 「일하는 기쁨의 비평적 변용」을 통해 문우(文友)로서 고인의 발자취를 돌이켜 본다.
정과리는 「일하는 기쁨의 비평적 변용」에서 홍정선의 삶의 세목을 전반적인 생애, 사회적 경력, 문학평론가로서의 이력, 문학사업가로서의 경력, 문학 교류 매개자로서의 활약까지, 크게 다섯 가지의 운동 궤적으로 나누어 꼼꼼하게 톺아보며, 홍정선을 이토록 치열하게 움직이도록 이끈 동력으로 ‘순수한 일의 기쁨’에 주목한다. 홍정선의 행보 곳곳에서 엿보인 순진무구한 진심에 대해 증언하며 그가 문학인으로서 남긴 활약은 곧 “‘스스로 합목적적인’ 행위, 아니 차라리 ‘무목적적인’ 자세”였다고 평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유의 문학관이 그의 비평 세계로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짚음으로써 홍정선의 인생 궤도들이 그리는 타원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비평임을 환기한다. 그렇게 고인의 순수함과 닮은 맑은 우정의 마음으로, 또 고인의 진중함과 닮은 웅숭깊은 문인의 마음으로, “홍정선의 비평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명할 날을 위해” “제주(祭酒) 한 잔”을 바친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자”
비평의 숙명, 숙명의 비평
비평의 출발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한 작품 읽기이다. 비평은 동시대의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에 대해 더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책임이 있으며, 자기 행위의 가치와 의미를 동시대의 작품 속에서 입증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비평가는 작품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읽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작품에 대해 공감의 시각이나 비판의 시각을 드러내기 전에 먼저 냉혹하고 잔인한 눈길로 작품을 뚫어 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_「비평의 숙명으로서의 작품 읽기」
홍정선은 그 누구보다 비평의 역할과 소명을 잘 이해하고 이를 실천한 문학평론가였다. 그에게 있어 비평이란 “동시대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는 장르”였고, 이에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작가들의 작품 읽기를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시대 문학에 대한 책임감을 토대로 치밀하게 텍스트를 분석하여 그 의미를 발굴해냈으며, 그와 동시에 너른 시선으로 각 작품이 놓여 있는 맥락과 흐름을 살폈다. 비평이 품고 있는 숙명이 무엇인지 깨달은 이상, 비평은 곧 그의 숙명이 되었으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비평으로 그의 문학적 인생을 모을 때만이 그 의미의 진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문학평론가 정과리)다.
『비평의 숙명』에는 40년간 이어진 홍정선의 문학적 생애의 깊이를 가늠해볼 수 있는 스물네 편의 비평이 묶였다. 글의 차례는 고인이 생전에 정리해놓은 순서를 따르되 큰 주제에 따라 총 다섯 개의 부로 나눴다. 1부와 2부는 시인과 시집에 대한 비평으로 꾸려졌다. 1부에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근대시 작품들에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는 한편 이상, 이상화, 김영랑, 백석, 윤동주, 유치환 문학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며, 2부에서는 정일근, 황동규, 김경미, 류근 등 현대 시인들의 시 세계를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3부를 채우고 있는 것은 소설론으로, 염상섭과 이청준의 문학사적 위치를 점검하고 이병주, 김원일, 박상우의 작품들을 면밀하게 다룬다. 4부에서는 비평과 연구에 대한 소신을 밝히며 해방기 시문학과 친일 시비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으며, 5부에서는 한ㆍ중 문학의 현황과 지향점을 구술함으로써 번역 윤리 실천과 비교 연구 및 학문 교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