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설고도 익숙한 질병, 뇌전증
뇌전증. 국내 약 37만 명의 환자가 앓고 있는 병이다. 전 세계 인구 1,000명 당 5~7명이 앓고 있으며 치매와 뇌졸중과 더불어 3대 뇌 질환에 속하는 질병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다수 시민은 여전히 이 질병의 이름조차 모른다.
뇌전증의 옛 이름을 들으면 곧장 익숙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뇌전증의 옛 이름은 바로 ‘간질’이었다. 이름 자체가 하나의 낙인으로 쓰인 그 질병이다. 이 질병을 앓는 환자들은 시시로 발발하는 경련 증상으로 인해 이른바 ‘악귀가 들렸다’는 비과학적인 편견에 시달려야 했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삶 자체가 파괴되곤 했다.
선교사 ‘로빈슨’이 뇌전증 치료 약품을 한국으로 가져오고 뇌전증 환우들을 위한 모임 ‘장미회’를 조직한 이후 수십 년이 흘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뇌전증 환자들의 건강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사회적인 편견이 해소되지 못한 채 겹겹이 쌓여 있다. 의사 김흥동의 《뇌전증 이야기》는 뇌전증 환자들을 향한 공포와 질병에 드리운 오해를 벗겨내고자 출간됐다.
1장 〈뇌전증 이야기〉에서는 뇌전증이라는 질병에 관한 모든 정보를, 2장 〈뇌과학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뇌’를 이해하기 위한 정보가 담겨 있다. 전문적인 용어와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낯설게 느낄 수도 있으나 전문가의 쉬운 풀이와 해박한 지식 덕분에 읽기에 어렵지 않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이다. 이를 통해 뇌전증을 향한 근거 없는 두려움과 잘못된 시선을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
■ 뇌전증 환우가 평등한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3장 〈뇌전증 환우의 권익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뇌전증 환자들이 직면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환자와 그들 가족이 직면한 문제는 지나치게 많다. 건강한 삶을 위해 필요한 약품이 건강보험 급여 대상에서 제외되는 문제, 뇌전증 환자의 건강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문제, 뇌전증 환자와 그들 가족의 삶이 고립되는 문제 등이 그러하다.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전증 환자는 여전히 동등한 시민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같은 나라 안에서 평등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생 동안 뇌전증 환자를 치료한 지은이 김흥동은 한국뇌전증협회의 회장으로서 오랜 시간에 걸쳐 ‘뇌전증 지원법’ 제정을 위해 몸소 행동했다. WHO가 전 세계 정부를 향해 ‘뇌전증 환자를 위한 체계적인 지원 체제를 마련하라’는 성명을 발표할 때에도 동참했고, 최근까지 뇌전증 지원법 제정하고자 동분서주하였다. 그가 이리도 환자들을 위해 애쓴 이유는 뇌전증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3장의 내용을 통해 뇌전증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 심리-정서적 문제와 이를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환자들의 이야기, 뇌전증의 진정한 목소리
이 책의 부록에는 의사 김흥동의 도움으로 뇌전증으로부터 벗어난 환자와 가족들의 수기가 모여 있다. 모든 이야기가 생생하면서 동시에 다채롭다. 뇌전증을 앓으면서 겪었던 차별과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족이 뇌전증을 앓으면서 어떻게 치료를 받았는지, 뇌전증을 앓으면서 나타난 증상이 무엇인지, 이후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 모든 것이 가감 없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뇌전증의 진정한 목소리’라 할 만하다. 관련 의료인이 아니더라도 필독을 권유하는 이유이다.
여러 수기를 읽다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세상이 뇌전증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과 이로 인해 환자와 가족들이 느끼는 두려움이다. 차마 남에게 하소연을 할 수 없고, 힘들고 어렵다며 위로를 구할 수도 없었다. 수기를 작성한 당사자들 대부분은 뇌전증으로부터 벗어났거나 증상이 많이 완화되었으나 그렇지 않은 숱한 뇌전증 환자는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지 쉬이 짐작된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하면서 동료가 되는 것처럼, 우리 곁에 있을 뇌전증 환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을 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