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구적 재난의 시대에 다시 읽는 고전
18세기 인본주의 서사의 전범으로 꼽히는 걸작
대니얼 디포의 대표작으로, 『로빈슨 크루소』 못지않게 영향을 끼친 고전으로 평가받는 『전염병 일지』가 서정은 씨의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의 285번째 책이다.
세계적 규모의 재난이었던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재난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나 그 같은 경험을 다룬 문학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전염병 일지』는 17세기 영국의 페스트 대유행을 기록한 글로써, 압도적인 재난 앞에서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보여 주는 글쓰기의 고전으로 꼽힌다.
『전염병 일지』는 1719년 『로빈슨 크루소』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작가로서 견고한 입지를 다진 대니얼 디포가 그로부터 3년 후인 1722년에 출간한 작품이다. 1720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페스트로 4만~6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망자가 발생하자, 1665년 대규모 전염병으로 10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던 영국은 그 재앙이 다시 되풀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책은 이러한 임박한 국가적 재난을 앞두고 디포가 시민들을 돕기 위해 쓴 것이다.
「전염병 일지」는 바로 그 1665년을 배경으로 페스트의 출현, 확산과 소강까지를 상세하게 그려 낸다.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화자인 〈나〉는 당시 〈계속 런던에 머무른 한 시민〉으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후 같은 재난을 겪을지도 모르는 후대 사람들이 행동 지침으로 삼기를 바라며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 말대로 〈나〉는 당시의 행정 명령, 예방 수칙, 사망 주보, 처방전 등을 인용하며 마치 신문 기자처럼 사실을 기록해 나간다.
이처럼 사실을 건조하게 기록해 나가는 글쓰기는 전염병을 어쩔 수 없는 천벌이나 자연재해가 아닌 합리적 분석과 구조적 개혁을 통해 대응할 수 있는 사회 문제로 이해하고자 한 디포의 선택이다. 일견 르포로도 읽히는 이 독특한 작품은 18세기 초 서구에서 등장한 인본주의 서사라는 범주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인본주의 서사는 신이나 자연이 아닌 인간을 중심에 두는 서사로,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 질병, 사망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해 기술하는 것이다. 이 같은 서사들은 사실만을 다루는 듯이 보이지만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그것을 개선하도록 실천을 촉구하는 효과를 지닌다. 인본주의 서사는 무엇보다 인간이 원인을 밝히고 이에 개입해 예방할 수 있다는 믿음, 즉 인간의 인식 및 도덕적 행위 능력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며, 그 믿음을 시대정신으로 확산하는 글쓰기였다. 「전염병 일지」 역시 페스트를 인간이 이해하고, 개입하고, 막을 수 있는 것으로 다루면서 우연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불행을 인간의 재난으로 번역해 낸다.
런던을 포위한 전염병은 자연재해인가
인간이 초래한 사회 문제인가
『전염병 일지』에서 〈나〉는 자신의 기록을 〈관찰〉, 〈기록〉으로 부르며 논평이 아닌 〈사실만을 주목〉하겠다고 말하지만, 그가 제공하는 정보에는 결코 평가가 누락되어 있지 않다. 사망자 수 추이를 나열하며 그에 결부된 정책의 공과를 평가하고, 병을 물리치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대응에 대해서도 평함으로써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작품은 1665년의 페스트에 대한 자료 수집과 관찰, 그리고 해석을 통해 1722년의 동료 시민들에게 전염병을 예방하거나 그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하려는 목적에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다.
때때로 이 작품은 전염병을 신의 심판이나 구원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전염병을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기보다 지도층과 시민의 타락을 비판하고 사회 개혁을 촉구하려는 인본주의적 의지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전염병이 돌자마자 런던을 떠난 왕가를 언급하며 그들의 행동이 〈무서운 심판〉을 불러왔을지도 모른다며 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을 비판한다. 화자의 종교적인 태도에조차 의학적, 행정적인 조치뿐 아니라 사회의 도덕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녹아 있는 것이다.
디포는 이런 끔찍한 시련 속에서도 더 고통받는 자와 덜 고통받는 자가 있다는 사실 역시 지적한다. 페스트가 퍼지자 부자들은 별장이나 시골에 있는 지인의 집으로 피신한 반면, 가난해서 피난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시에 남아서 죽음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상류층의 자선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그들은 벼랑 끝에 몰린다. 감염자가 나와 봉쇄된 주택을 감시하거나 페스트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 노릇을 하거나 넘쳐나는 시신들을 수습해 시체 수레에 싣고 구덩이에 매장하는 일을 하는 등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전염병이 종식된 후 살기가 더 어려워진다. 재난의 시기에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돈을 기부한 많은 사람들이 그 자비의 손을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다.
『전염병 일지』는 이처럼 전염병을 일차적으로 이해하고 해결할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상황으로 다루며, 전염병을 하나의 사회 문제로 제기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방안들뿐만 아니라 윤리적 성찰과 사회 개혁이 요구된다고 역설한다. 재난을 인본주의적으로 접근하는 이러한 태도는 재난이 일상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다시금 그 문제의식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허구와 실제를 오가는 생생한 글쓰기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다
이 작품은 출간 당시부터 허구인지 실제 기록인지, 어떤 장르에 속하는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어 왔다. 당시에는 익명이 런던 시민이 남긴 일지라는 형식에 다양한 사료들을 인용하고 있어서 허구보다는 실제 기록으로 읽힐 때가 많았다. 지금도 일종의 저널리즘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역사 소설로 읽어야 할지, 이 글의 분류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그만큼 허구를 실제처럼 생생하게 재현해 내는 디포의 특기가 빛을 발한 작품으로, 독자들을 현장으로 데려가듯 한 세기 전의 일을 실감 나게 그려 낸다.
디포는 1665년의 런던의 모습과, 최초의 감염자가 등장하고 뒤이어 무섭게 확산되다가 절망의 끝에서 페스트가 사그라드는 일련의 상황을 촘촘하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독자는 무려 4세기 전의 영국으로 이동해 그 모든 고통과 절망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재난의 풍경이 때때로 몹시 낯익은 것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특히 코로나19를 겪은 우리에게 전염병이 안기는 고통과 절망, 두려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회 곳곳의 문제들을 돌아보는 이 글을 읽는 실감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옮긴이의 한마디
코로나19뿐만이 아니라 재난이 일상화된 사회에 사는 한국에서는 재난을 인본주의적으로 접근한다는 것, 즉 개입하고 예방할 수 있는 인재(人災)로 해석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 묻게 하는 독서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