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정원
김윤경(화가)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에게서 영감을 얻어 ‘옥중 수고(Prison Notebooks)’, 즉 작업실 안에서 마음의 행로를 따라 내적 세계로의 침잠을 추구하며 자신을 발견하고자 했던 작가는 이제 대자연 속에서 새로운 화법을 발견해 나가며 무언가 자신보다 훨씬 큰 존재에 이끌리는 듯 작업을 이어 나간다. 새 그림들 속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의 색, 담팔수 색, 하얀 눈의 색 등 보다 자연적인 색이 있다. 고요한 가운데 갖가지 빛과 그늘이 끊임없이 형상을 만들다 작가의 캔버스 위에 안착된 것만 같다. 바쁜 도시의 환경과 네모난 작업실 안 풍경이 익숙했던 작가에게 제주는 변화무쌍한 자연의 경이로움 그 자체로 다가왔을 것이다. 언제나 똑 같은 것만 같은 마당 구석구석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화폭에 옮기자고 결심한 순간 사라져 버리고 이내 다른 풍경으로 변해 있는 것을 경험했다는 작가는 오래된 것, 변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새로운 것, 변화하는 것 등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에서 ‘사이의 색’, 혹은 ‘사이의 형태’를 찾았다. 즉 이전의 원색이나 짧은 막대 혹은 책의 형상, 그리고 조형 요소로서의 글자가 사라지고 보다 은은한 색, 동심원, 빗방울이나 고양이의 형상 등 보다 유기적인 형태로 자연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시인과 화가 등의 예술가들이 경험했다는 대자연 앞에서의 숭고미는 젊은 작가의 캔버스 속에서 제목처럼 ‘적막 환상’의 세계로 다소 고요하고 아득하게 표현된다. 작가가 매일 보는 마당의 풍경, 점점이 이어진 징검돌, 신비스러운 고양이, 푸른 식물들 위에 쏟아지는 하얀 달빛 등 일견 소소한 일상의 풍경인 듯하지만 시시때때로 그 모양을 달리하는 자연의 변화를 여지없이 보여 준다.
〈해설2〉
마당 산책자의 어느 맑은 오후
이병률(시인, 여행작가)
맑지 않다면 농담이 될 수 없는 세계를 정인희 작가는 꼭 움켜쥐고 있습니다.
마당 산책자는 세상에 줄을 설 필요도 없고 가진 것의 숫자를 셀 필요도 없습니다. 정인희 작가가 마당에서 발굴한 보물들은 동시에 자기 안에서 캐낸 보물이기도 한 것이므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더 선명하게 옮길 수 있었을 거라 확신합니다.
첫 감각을 잡아챈 서정의 목소리를 이토록 맑게 펼쳐놓은 정인희 작가의 세계 앞에서 우리는 자꾸 둥글어집니다. 마당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쌓이고, 고양이가 지나갔을 뿐인데 우리는 자꾸만 둥글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