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시작 율곡, 소통, 화합, 민생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다
율곡(栗谷) 그는 천재였다. 백 년에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온 억겁의 세월 동안 전대미문의 첫째가는 천재였다.
일찍이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이상의 세계였다. 조선왕조가 길러낸 숱한 선비 가운데 지금껏 회자되어 마땅한 표상이었다. 국법은 지엄해서 한 번 정하면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뜰 때, 제아무리 지엄한 국법일지라도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일백 번이라도 바꿀 수 있다고 외친 학자였다. 꽝꽝 얼어붙은 보수의 대지 위에 홀로 거역하여 진보의 씨앗을 움 틔워낸,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연 정치가였지만 죽는 날까지 흔들림이 그칠 줄 몰랐다.
왕조의 기왓장이 속절없이 허물어져 내릴 때 36세의 그는 이미 당대의 중심인물이었다. 개혁이 가로막혀 벼슬을 내려놓을 적마다 대장간에서 호미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구태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는 지배 세력을 혁신하고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하자고 외친 고독한 이단이었다. 나무가 크면 바람 잘 날이 없다. 무언가를 고집스럽게 하려거든 반대의 벽도 없지 않았을 터이다.
개혁을 외친 그는 생전에 환대받지 못했다. 영의정(정1품) 이준경은 그를 경계하라고 점찍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는 붕당 이전만 해도 그는 분명 전체 사림으로부터 존숭받는 인물이었으나, 동인과 서인 양당으로부터 동시에 핍박을 받았다. 나중에는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이라는 배척 속에 끝내 탄핵당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그가 죽기 몇 달 전에는 조정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이룬 동인으로부터 ‘소인(小人)’으로 내몰렸다. 당대에 소인이라는 규정은 그저 단순한 비난이 아니었다. 성리학이 이데올로기였던 왕조에선 곧 배제와 박멸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시대의 주홍글씨가 다름 아니었다. 이 같은 핍박은 그의 사후에도 그칠 줄 몰랐다. 성균관 유생 모두가 일찍이 동방에 없던 성인이라고 그를 추앙하였음에도, 사후 백골이 진토되었을 즘에야 겨우 문묘종사에 배향(숙종 7년)될 수 있었다. 그도 모자라 예송논쟁(1674)과 기사환국(1689)을 거치면서 서인이 몰락하고 말자, 문묘종사에서 그를 축출해야 한다는 상소가 또다시 빗발쳤다.
김지하의 시 「무화과」에 이런 논쟁이 오간다. 꽃 없이 열매 맺는 것이 무화과인가, 열매 속에 속꽃으로 피는 것이 무화과인가. 해석의 차이를 두고 역사는 다툰다. 우린 그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무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학창시절 얼핏 엿들은 이기일원론이며 주기철학, 그가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 아닌 노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더 주목했다는 정도를 빼고 나면, 과연 또 무엇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굳이 이 사람을 가슴에 또 품어야한단 말인가?
과거는 과거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흘려보내야 한다.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더라도 기어이 부서져 스러지고 마는 것이 있다면, 햇볕에 발하고 달빛에 젖더라도 꼭 스러지지 않는 불멸 또한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가 죽은 지 2백여 년도 훨씬 더 지난 영조(21대) 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재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는, 그의 저서 「성학집요」가 군왕과 대신들이 학문을 배우고 국정을 논의하는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는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아주 오래된 시간들로부터 그에 대한 기억을 끝내 되살려내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사나운 바람속에 제비꽃들의 흔들림이 멈출 때까지 하염없이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