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바닥에서 평화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지식인의 성찰과 모색
이 책에서 자신이 실무를 주도했던 단체에 대한 와다 하루키의 평가는 냉정하기만 하다. “국민협회는 2020년을 맞아 우리의 패배를 인정하고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이후 나아가야 할 길을 생각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라며 선선히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용어는 ‘패배’다. ‘실패’가 아닌 ‘패배’라는 말을 썼다면, 승리를 거둔 상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국민협회를 이끈 이들은 왜 패배한 것일까. 또 승리를 거둔 이들은 누군가. 와다 하루키는 전전戰前 체제의 일본 역사에 미련을 갖는 ‘보수 세력’과 지난 역사를 사죄·반성하며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던 ‘진보 세력’이 북일 국교 정상화라는 ‘결정적 전선’에서 맞붙었고, 이 처절한 싸움에서 보수 세력이 승리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진보 세력은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과 군의 관여를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와 지난 식민 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담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 진일보한 역사 인식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에 행한 식민 지배에 대한 ‘진정한 청산’을 마무리하는, 북일 국교 정상화라는 더 중요한 싸움에선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 결정적 변곡점이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역사적 ‘평양 방문’이었고, 이 싸움의 향방을 사실상 결정지은 핵심 변수가 이 책의 중심 주제인 일본인 납치 문제였다.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는 올해 말에 활동을 끝내게 된다. 그러나 나는 절망의 바닥 끝에서 희망을 본다. 일본 국민은 북일 국교 정상화를 반드시 달성할 것이다. 동북아시아 평화의 집, 함께하는 집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는 열어젖히지 않으면 안 되는 문이다. 하지만 일본 국민이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한국 국민의 이해와 지원이 필요하다. 먼저 이 책을 읽는 한국 독자들이 이에 가세해 주길 바란다.
_ ‘한국어판 서문’에서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그리고 아베의 납치 3원칙
고이즈미는 평양 방문을 통해 북일 국교 정상화라는 새 역사를 열려 했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납치 문제에 사과하면서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다. 납치 문제가 일부 사람들이 제기해 오던 ‘의혹’에서 ‘사실’로 지위가 변하게 되면서 일본 사회가 상상하지도 못할 수준의 분노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을 실현했던 한 외교관은 “납치 문제로 인해 전후 오랜 시간 한반도에 대해 ‘가해자’라는 의식을 가졌던 일본의 입장이 처음 ‘피해자’로 바뀌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순간 일본의 내셔널리즘적 대중 정서가 매우 강하게 터져 나왔다”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납치 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분노가 폭발하며 일본에선 아베 정권이 탄생했다. 이를 통해 이후 일본의 국책으로 굳어지게 되는 아베의 ‘납치 3원칙’이 만들어진다. 납치 3원칙이란 ① 납치 문제는 일본의 최중요 과제다, ② 납치 문제의 해결 없이 국교 정상화는 없다, ③ 납치 피해자는 전원 생존해 있어 피해자 전원 탈환을 요구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와다 하루키는 이 원칙에 대해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한 가해의 책임을 부정하고, 일본이 받은 피해만을 절대시하면서, 외교를 통한 문제 해결을 부정하고 북한과 철저히 싸우고 징벌을 가하려는 방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불행하게도 납치 3원칙은 이후 북핵과 미사일 위기가 첨예해지면서 북일 국교 정상화 3원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원칙은 북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선 북한이 ①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하고, ② 모든 사거리의 탄도미사일 폐기하며, ③ 납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북한에 절대 굴복을 강요하면서 도무지 실현 불가능하고 무책임한 결론일 뿐이다. 결국, 상대가 이행할 수 없는 요구를 제시해 북일 국교 정상화를 사실상 포기하고, 북한에 압력을 가해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원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포기할 수 없는 한반도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의 길
이처럼 북일 국교 정상화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면, 두 나라는 ‘영원한 적대’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런 갑갑한 상황은 지난 30여 년간 한반도와 세계정세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쳐 왔다. 1989년 말 냉전 체제가 붕괴한 뒤 나라가 붕괴할지 모르는 국난에 몰리게 된 북한 앞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핵 개발을 통한 ‘대결의 길’과 미일과 수교를 통한 ‘개방의 길’이다. 한국이 중국·소련과 수교한다면, 북한 역시 미국·일본과 수교해 그 효과를 상쇄하면 된다. 냉전이 마무리되던 시점에 한일 모두가 공감하던 ‘교차승인론’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대결의 길을 택했고, 북한과 사실상 화해를 포기한 일본이 선택한 길 역시 미일 동맹을 강화해 ‘위험해지는 북한’과 ‘부상하는 중국’에 맞서겠다는 대결의 길이었다.
아베의 납치 3원칙으로 인해 북한과 일본이 관계를 개선할 가능성이 사라졌다면, 그래서 일본이 한반도 평화의 ‘조력자’ 역할을 해 줄 가망이 아예 없어졌다면 한국은 일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이제 우리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차례다.
와다 선생은 이 책에서 일본의 대북정책을 좋은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 그 어떤 실마리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현실주의자 와다 하루키의 최종 결론이라 한다면, 이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갈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한국인 자신일 수밖에 없다. 2019년 봄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의 실패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작동을 멈춘 지 4년이 흘렀다. 이후 한반도 정세는 살벌하게 악화돼 왔다. 쉽지 않겠지만, 이 컴컴한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해 내야 한다.
_ ‘옮긴이 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