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그너의 족쇄, 반유대주의
이제 루머와 악명으로 둘러싸인 바그너의 다른 면을 살펴볼 차례이다. 바그너의 음악적 업적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그너의 음악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그를 둘러싼 반유대주의 논란 때문이다. 바그너는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에세이 『음악에서의 유대주의』를 썼으며 그의 음악은 사후, 히틀러에 의해 나치즘 선전에 사용됐다. 바그너는 정말 반유대주의자일까? 인터뷰어인 저자는 『음악에서의 유대주의』를 비판하며 반유대주의 사상의 진위를 묻는다. 이에 대해 바그너는 양부로 알려진 유대인 루드비히 가이어가 자신의 친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므로 자신은 반유대주의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은 그저 기회주의자일 뿐이라 답한다.
바그너는 이외에도 여성 편력, 채무불이행 등의 논란이 있다. 인터뷰어는 그의 행적을 물으며 과오를 비판하는 한편 루머의 실체를 밝힌다. 그의 모든 잘못을 옹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은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모두 가지고 있어 한 면만 보고 평가할 수는 없다. 바그너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러 형체로 얼굴을 바꾸는 악마’ 바그너. 악명에 가려진 그의 진짜 모습을 만나보자.
▶ 바그너의 광활한 음악세계로
바그너의 오페라는 열세 편으로 많지 않으나 모두 높은 완성도와 무게감 있는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바그너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적 형식에서 탈피하여 드라마, 교향악, 무대장치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예술, 뮤직드라마(악극)를 창조하였다. 악극의 실마리를 보인 작품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다. 바그너 음악의 시금석이라고도 평가받는 이 작품은 사랑을 위한 희생과 사랑을 통한 구원의 주제를 처음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탄호이저》는 오페라에서 뮤직드라마(악극)로 나아가는 음악적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며 성악이 관현악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연결하는 이행기법을 처음 시도한 곡이다. 《로엔그린》은 뮤직드라마 전 단계의 오페라로 잘 구성된 유도동기가 가사를 모르고, 무대를 보지 않아도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바그너는 네 편의 뮤직드라마를 작곡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뮤직드라마에 속하는 첫 작품이자 바그너의 오페라 중 최고작으로 꼽힌다. 여기에서 바그너는 자신이 고안한 무한선율(단락감이 없는 가창선율)을 통해 복잡한 사건을 단일하게 압축하고, 간단한 사건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는 중세 노래 경연을 C장조로 풀어내어 환희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니벨룽의 반지》는 이른바 반지 4부작으로 불린다. 바그너는 장대한 음의 파노라마로 극을 이끄는 동시에 거대한 연출 규모를 보여주어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은 기독교와 불교 등의 종교적 요소를 띠고 있으며 그의 오페라 중 가장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3편의 초기작은 앞서 말한 중기 이후의 작품에 비해 저평가되어 현재 거의 연주되지 않으나 짜임새 있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바그너는 《요정》에서 독일의 민족적 낭만주의 양식을, 《연애금지》에서 선율과 성악에 치중한 이탈리아 양식을, 《리엔치》에서 프랑스의 그랜드 양식을 시도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기의 역작을 작곡했으며 악극으로 불리는 후기의 대작들을 창작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바그너의 전 작품을 다룸으로써 바그너의 음악과 그의 삶을 통시적으로 만날 수 있게 했다. 인터뷰어는 오페라의 배경이 된 신화와 설화를 통해 오페라의 서사를 이야기 들려주듯 설명한다. 또한 바그너가 확립한 무한선율과 유도동기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어떠한 느낌을 주는지를 상세히 묘사하여 그의 음악을 눈으로 들을 수 있게 했다.
그는 처음부터 네 개의 음이 함께 울리면서 끝 모를 듯 팽팽하게 이어지는 트리스탄 화음과 해결을 무한정으로 미루는 불협화음을 사용하여 이른바 무한선율을 시도했다. 이로써 사랑과 죽음의 음악적 동기를 나란히 전개하기도 하고 대립시키기도 하면서 음악이 드라마가 되고, 드라마가 음악이 되는 종합예술을 만들었다.
「바그너의 오페라에 관하여」 중에서
바그너는 후대의 음악, 영화, 회화,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바그너 음악뿐만 아니라 현대 예술의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