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개인적인 이야기
가장 정치적인 이야기,
수만 개의 이야기를 불러일으킬 단 하나의 이야기
“나는 왜 결혼했고, 왜 참고 살았으며, 또 어떻게 털고 나올 수 있었을까?”(p. 9)
7년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후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고학자 같은 태도”(p.10)로 자신의 인생을 탄생 시점부터 파 내려간다. 사진과 책, 편지와 일기 같은 사적 기록은 물론, 과거의 신문 기사와 방송 프로그램, 인터넷 커뮤니티 글과 유튜브 영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서를 하나의 이야기로 유려하게 엮어낸다.
1960년대 성난 해일처럼 세계를 뒤덮고 뒤엎었던 2물결 페미니즘은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여자 개인의 문제로만 보였던 연애와 결혼, 성관계와 임신 중단, 육아와 가사 분담이 곧 여자 모두가 짊어진 정치적 문제라는 깨달음이었다. 세대와 혼인 여부를 막론하고 여성 모두에게 작용하는 “하나의 중력”(p.17)을 짚어내며 “내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이야기고, 우리의 이야기는 네 이야기”(p.66)임을 깨닫는 〈탈혼기〉는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구호가 유효함을 증명한다.
태어나면서 주어진 여자라는 운명에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저항해 온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을 겹쳐보며 묵직한 희망을 품게 되는 책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아마 당신도 당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질 것이다.
비혼과 기혼 편 가르기를 넘어
같은 여자로서 같은 빛을 향해
〈코르셋: 아름다움과 여성혐오〉, 〈여자는 인질이다〉 등 네 권의 굵직한 페미니즘 도서를 번역하기도 한 저자 유혜담은 “여자들의 바싹 마를 대로 마른 분노에 불을 지핀”(p.214) 페미니즘 불길을 2015년부터 목격해온 증인이기도 하다.
“쨍하게 도수가 맞는 페미니즘이라는 안경”(p.225)을 쓴 여자들은 정치, 사법, 언론, 예술 등 전 분야에 깊게 뿌리 박은 구조적 성차별의 시정을 요구해왔다. 그와 동시에 화장과 꾸밈 노동, ‘쿠션어’와 ‘애기어’, SM 플레이와 BL 소설처럼 여자의 취향 혹은 선택으로만 여겨졌던 행위도 새로운 눈으로 점검해나갔다.
결혼제도 역시 재점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부장제를 떠받치는 기둥이자 “몸 깊이 자리 잡은 암 덩어리”(p.316)처럼 내밀한 곳까지 침투한 제도를 정조준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한때 ‘기혼’ 페미니스트로서 “남자를 사랑하는 만큼 자매들을 사랑”(p.229)했던 저자는 여성 집단 내에서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상처와 분열을 기록한다. “알 만큼 알게 된”(p.326) 후 지식을 자기 삶에 적용하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도 여실히 드러낸다.
결혼제도로 인한 여성 공동의 억압을 일깨우는 〈탈혼기〉는 결혼 여부로 여성끼리 적대시하지 않고서도 억압의 뿌리를 직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절벽 너머
여자가 행복해지는 이야기
저자는 이혼을 결정했을 때 “이야기의 절벽으로 뛰어드는 기분”(p.292)이었다고 설명한다. 이혼하고도 남자 없이 행복하게 사는 여자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탈혼기〉는 “인류와 역사와 세계라는 거대한 그림”(p. 306) 속에서 여태 존재하지 않던 이야기를 씩씩하게 써나간다. 저자는 이혼 후 주변 여자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여자들끼리 누구 눈치 안 보고 마음 편히 자기 이야기를”(p.290) 할 수 있는 공간을 도모하고, 남자를 사랑하는 대신 “나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p.291)하게 된다.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여자라고 말할 때 자긍심이 차오른다면”(p.307) 그 이야기는 전혀 사소하지 않다. 여는 말처럼 “책 한 권이 필요한 이야기”가 분명하다고 수긍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