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여자들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았고,
그릴 필요가 있는 대상도 아니었다.
나에게는 참고할 것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 윤석남 작가 노트 중에서
이 책은 여성주의 아티스트 콜렉티브 사일런트메가폰이 2023년 4월 22일부터 5월 7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2관에서 개최한 〈발푸르기스의 밤: 한국의 마녀들〉의 도록이다. 전시되었던 17팀 54점의 작품 사진을 빠짐없이 싣는 한편, 작가 노트와 이력을 국·영문으로 간추려 참여 작가 각각이 갖는 작품 세계의 윤곽을 그려낸다. 전시 행사였던 작가와의 대화를 현장감 있게 전달했으며, 전시 구석구석을 다각도로 비추는 두 편의 평론과 함께 1985년부터 2023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주요 여성주의 미술 단체와 전시를 꼼꼼히 기록한 연표를 포함한다.
한때 초상화를 “그릴 필요가 있는 대상”(p.15)조차 아니었던 여성들은 직접 붓을 들고 나서 예술사 속에서 자기 영역을 구축해왔지만, 서로와 연결되지 못한 채 파편으로 존재하는 외로움을 감내해야 했다. 본 도록은 풍부한 텍스트와 자료로 “여성도 인간이라는 자기 주체를 찾아 가는”(p.15) 용감한 여자들의 노력을 연속성 있는 계보로서 포착한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어도,
우리는 모든 세대가 함께할 수 있는
모닥불을 피웠잖아.”
- 후기 만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중에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유럽의 민속 축제 발푸르기스의 밤은 모닥불 앞에서 사악한 마녀를 향한 공포를 털어내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기회였다. 그러나 ‘마녀’로 몰려 처형당할 가능성을 늘 안고 살아가던 그 시대 여자들에게야 악몽처럼 다가오지 않았을까?
몇 세기 후 한국 광화문 한복판에서 〈발푸르기스의 밤: 한국의 마녀들〉 전시를 연 사일런트메가폰은 이 모닥불의 의미를 뒤집어 가부장제 사회에서 ‘마녀’ 취급받는 모든 여자에게 “어찌 되었든 여성이라면 이유 없이 모일 수 있는 그런 자리”(p. 168)를 내준다.
2016년 창단 이래 선명한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유지해 온 사일런트메가폰의 지난 전시들은 익히 ‘여성들의 명절’이라 불릴 정도로 대중적 흡입력을 입증했다. 새로이 페미니스트로 각성한 젊은 여성들은 나날이 정교해지는 생존 위협 속에서도 이 전시들 덕분에 “재난 가운데 조용한 축제”(p.170)를 즐길 수 있었다.
사일런트메가폰이 7년간 쌓은 역량이 총 집결된 본 도록은 기존의 4세대 페미니스트 작가들에 국한되지 않고 판을 넓혀 “여자로 살아온 자기 생을 원료로 외로운 도깨비불”(p.173)을 피워 온 모든 세대의 여성 예술가들을 넉넉한 모닥불 앞으로 초대한다.
“이곳엔 도취한 자를 관망하는 이방인도 없다.
마녀들의 화합만이 존재할 뿐이다.”
〈ol〉사일런트메가폰 〈버추얼 브로켄 마운틴〉 작품 중에서〈/ol〉
그렇게 모닥불 앞에 모여 앉은 작가의 면면을 둘러보면,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여성주의 미술가로서 여성 초상에 천착해 온 윤석남에서 출발해, “인류의 신화 심연”으로 들어가 “흩어진 여신의 이야기”(p.91)에 귀 기울인 박영숙, 평범한 한국 중년 여성의 몸을 “인간을 대표하는 소재”(p.131)로 쓴 데비 한, 피에타 도상을 전복해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됐던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에 파열을 낸”(p.142) 송상희, 여자가 가정에서 당하는 “은폐된 물리적 폭력을 가시화한”(p.136) 노승복을 거쳐, 토속신 마고할미가 관장하는 극락을 펼쳐 여성들에게 “근본적인 자긍심”(p.109)을 심어주는 춘희와 “임신은 종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한 개체를 임시로 기형 상태로 만드는 일”(p.115)이라고 담담히 선언하는 98년생 4세대 여성주의 예술가 작살에 이르는 “마녀들의 화합”(p.76)이다.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 속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p.24)를 발견한 이들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여성들의 고통과 욕망, 타협과 무기력, 분노와 저항, 자매애와 연대를 각기 다른 매체와 각도로 접근해 여성의 삶이라는 보편성에 도달한다.
이들의 작품은 본 도록 안에서 신명 나는 살풀이춤을 춘다.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기획자와 작가 그리고 관람객이 여성주의라는 이름으로 3인 4각의 조화”(p.170)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불의 제단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공통의 관심사로 서로 공명하는 여성들의 연대”(p.146) 속으로 모든 여자들을 초청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