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호남선교의 기틀을 다진 하위렴 선교사
맨 처음 하위렴의 행적을 마주한 것은 그를 통해 복음을 듣게 된 필자의 증조부이신 백낙규 장로(동학농민항쟁 당시 우금치전투에 참여했다가 패한 후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하위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후에 장로가 되었으며, 그의 향리 익산에 동련교회와 계동학교를 세워 복음 전파와 민족계몽에 앞장섰다.)의 개종의 과정을 좇으면서부터였다. 그와 관련된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예기치 않았던 하위렴의 선교행적을 만나게 되면서 내친김에 책으로 엮게 된 것이다.
‘조선 선교사 하위렴의 선교행전’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이 책은 그의 연보(年譜)를 따라 전기형식을 취했으며 무엇보다 조선에서의 사역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구한말 열강의 침탈에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지던 조선에 들어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호남선교의 기틀을 다져온 남장로교 선교사였다.
군산 선교의 기틀을 놓았던 전킨(William M. Junkin)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후,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을뿐더러 그의 사역을 마무리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비록 그의 재임 기간 내내 부위렴(William F. Bull)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가 함께 사역했지만, 지부는 줄곧 그의 리더십 아래 있었다.
특히 군산 선교부를 이끌며 이 지역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선교사 가운데 전킨과 부위렴 그리고 하위렴 이 세 사람은 공교롭게도 모두가 남부 출신이라는 공통점에, 유니온신학교 동창이라는 끈끈한 학연으로 맺어진 선후배 관계에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들 모두의 이름은 윌리엄이었다.
그 후에 하위렴 선교사가 선교부의 긴박한 사정으로 지부를 옮긴 적도 있고, 또 아내의 병고로 자리를 비우던 시기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여러 지부의 사역을 공시적(共時的)인 안목으로 파악하고 호남선교의 교두보를 구축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테이션의 효율적 운용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는 양보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늘 무심함에 가려지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선교역사가 절반을 점하고 있는 한국 교회사이기에 선교역사가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이제는 가려져 있던 선교사들에게도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다행히도 하위렴 선교사의 행적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하위렴 선교사의 행전 발간을 계기로 묻혀 있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역과 활동을 새롭게 조감(鳥瞰)하고 초기선교 역사를 거시적 안목으로 바라보게 하는 지남차(指南車)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바람이다.
덧붙여 이 책에 인용한 사진 자료들은 대부분 인쇄물에서 퍼온 것들이라 초점이 흐려 유감이지만, 글로만 전할 수 없는 또 다른 면모를 전달해 주리라 기대하며 그대로 사용하였다.
하위렴 선교사의 역할과 비중
이 책에서는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하위렴 선교사의 사역을 정리하면서, 그의 역할과 비중에 주목하고 그가 가시화했던 남장로교 선교전략이 이 지역 선교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살피고자 했다.
하위렴 선교사는 의료, 교육, 복음 사역 등의 분야에서 전천후 사역을 할 만큼 다양한 은사를 가진 선교사였으나 공교롭게도 그가 사역했던 3개 선교지부 어디서도 스테이션 조성이라는 마뜩잖은 일이 맡겨지고 있었다. 전문적 지식이나 안목이 없이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사역이었으나 그는 그때마다 어김없이 그의 역량을 발휘해 성공적으로 완수해 냈다.
병원과 학교건축 그리고 교회 설립 등을 포함한 유형의 선교기지 조성은 물론 나아가 공의회와 노회 설립에도 깊숙이 관여해 교회 조직과 제도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도 그의 수완(手腕)은 빛을 발했다. 이처럼 그가 구축한 유무형의 인프라를 통해 그 이후의 호남선교는 발길이 훨씬 수월해지고 있었다.
이렇듯 그는 남장로교의 선교 기반을 다듬어 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예기치 않은 시련이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7인의 개척선교사였던 아내 데이비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선교 초기부터 그의 사역에 위기를 맞아 군산지부의 전킨과 사역지를 교환하기도 하고, 얼마 후 에드먼즈와 재혼하면서 그의 선교 여정에 재시동을 걸었으나 무리한 사역은 그의 섬약한 체질을 끊임없이 괴롭히기도 했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부진했던 목포지부가 맡겨지고 있을 때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교회, 학교, 병원 등 어느 것 하나도 빠짐이 없이 정상화시키는 동안 자신은 물론 아내 에드먼즈마저 다시 병고에 시달리면서 또 한차례 시련이 찾아왔다.
1912년 미국에 돌아가 3년 가까운 치료와 요양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건강이 온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 이때가 선교사로서 그의 진퇴를 결정해야 할 만큼 그에게 닥친 최대의 위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으로 복귀해 몇 해 만에 군산 선교를 정점에 올려놓으며 기염을 토했다.
시련을 딛고 이 땅에서 이뤄낸
사역의 결과물들은 성령의 능력
1922년 군산지부를 방문했던 해리 로디스Harry A. Rhodes 목사는 이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지난 25년 동안 군산에서 거둔 놀라운 결실은 씨 뿌리고, 가꾸고, 돋우며 수고한 모든 사역자의 결과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관할 지역의 크기나 스테이션의 위치 등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75개의 교회에 5,000여 명의 교세를 일구고, 성인 세례교인만 1,500명에 이르는 부흥에 크게 놀라워하면서 손배돈과 동역하며 전국 남장로교 병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최고의 전성기를 이뤄낸 야소병원에 와서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복음을 들고 외길을 줄달음쳐 사명을 완수한다고 하는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증인의 사역은 바로 그분의 임재와 함께 부어지는 능력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위렴 선교사가 시련을 딛고 이 땅에서 이뤄낸 사역의 결과물들 역시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는 조선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 그 자체였다.
하위렴 선교사가 조선 땅에 쏟아부은 고귀한 헌신의 자취를 추적하며 이 책을 통해 그의 선교 여정을 드러내 보고자 한 것은, 전체적인 한국 선교(사宣敎史)를 바라보게 하는 귀중한 단서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저자의 욕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키워낸 맹아(萌芽)로부터 그렇게 풍성한 결실을 수확하면서도 전혀 돌아보지 못했던 송구스러움이 앞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