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한국 영화의 혼불
나운규와 〈아리랑〉
1926년 단성사에서 개봉한 〈아리랑〉은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사실주의에 입각한 영화로, 조선 영화 최초의 대형 흥행작이자 문제작이었다. 특히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8·15해방 이전에 만들어진 한국 영화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항일 민족운동의 새로운 양식을 알려주었으며, 우리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을 영화화해 민족의 혼을 되살려 놓았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주연까지 1인3역을 맡은 나운규는 조선 영화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급부상했으며, 이후 한국 영화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가 되었다.
나운규의 업적과 영화에 대한 열정을 기리기 위해 1990년 춘사영화예술상이 제정되었고, 문화부에서는 1991년 ‘연극영화의 해’를 기념해 그를 ‘1월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리고 1993년 정부는 영화로 민족정신을 드높이고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아낸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1937년 8월 9일, 나운규는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과로 등이 겹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최초의 영화인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영화인들의 추모 속에 〈아리랑〉의 개봉관인 단성사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조선 영화에서 한국 영화로
나운규를 넘어 새로운 나운규로
1902년 10월 27일에 태어난 나운규는 3·1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독립군 비밀 단체에 가담해 2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이때 춘사라는 호는 감옥에서 얻었다. 1924년 영화계에 진출해 15년 동안 남긴 작품은 29편에 이르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중 직접 각본과 감독, 주연을 맡은 영화는 15편이나 된다. 특히 1926년에 개봉한 〈아리랑〉과 이 작품을 만든 나운규는 조선 영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흥행 여부에 따라 기대와 실망이 달라지곤 했지만, 나운규는 조선 영화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숱한 검열에 부딪히면서도 자신만의 예술관을 표현하려 애썼고, 상업성의 굴레 속에서도 작품 안에 남다른 민족정신을 표출했다.
지금 그의 영화는 스크린에서 마주할 수 없지만, 그가 생전에 신문과 잡지에 쓴 글과 대담을 통해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나운규의 글과 말로 나운규를 만나고, 나운규의 시대를 함께한다.
《나운규의 말》은 나운규 한 개인의 이야기이면서도 한국 영화의 굴곡진 삶이자 역사이기도 하다. 나운규가 토해내는 글과 말은 조선 영화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 영화의 어제와 오늘이며, 영화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모든 이들의 목소리이다. 그렇게 이 책은 나운규 개인에 머물지 않고, ‘내일의 나운규’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나운규의 말》로 조선 영화를 넘어 한국 영화를 읽고, 새로운 ‘나운규시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