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에 불교계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가 수감되어 옥고를 치른 후, 1922년 감옥에서 나온 승려 한용운(1879~1944)은 설악산으로 들어가 오세암(백담사 암자)에 칩거하면서 1925년 여름 연달아 두 권의 책을 완성한다. 한문체 『십현담 주해』(1926)와 국문체 시집 『님의 침묵』(1926)이 그것이다. 『십현담 주해』가 『님의 침묵』보다 두 달 정도 먼저 탈고(1925. 6.)되었지만, 이 둘은 모두 설악산 시대에 쓰여진 한용운의 대표작으로서 이듬해 서울에서 나란히 출판되었다.
『십현담 주해』가 입산 이후의 그의 선학 사상의 요체를 담은 것이라면, 『님의 침묵』은 그가 한문체 아닌 국문체로 시를 쓰는 근대 시인으로서의 전신과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님의 침묵』 한 권으로 불후의 시인이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십현담 주해』의 저 현묘한 선禪의 세계의 침잠과 선적 사유가 놓여 있었다. 이 둘은 서로서로 비추는 거울과 같은 책으로서 설악산 시대의 ‘2부작’이라 할만하다.
『십현담 주해』는 한용운이 남긴 유일한 선학 텍스트 주해서이다. 그를 단순한 승려 아닌 선사라고 지칭할 때 선사로서의 진면목은 바로 이 저서에 들어있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용운 연구에서 『님의 침묵』에 비해 별로 주목되지도 널리 읽어지지도 않았고,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본문이 전부 한문체인데다 중국 10세기 선사 동안상찰(同安常察, ?~961)의 『십현담』을 주해한, 난해한 선학 텍스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한용운의 선사상의 요체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이와 관련지어 『님의 침묵』을 읽고자 한다면, 『십현담 주해』를 먼저 정독하고 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십현담 주해』는 선사로서의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저서이며, 그의 글쓰기에서 중요한 고비를 이루는 작품이다. 단순한 뜻풀이 수준의 책이 아니라, 주해註解 형식을 빌어 자신의 깨달음과, ‘정위正位’와 ‘편위偏位’의 겸대兼帶의 선禪, 정위는 다른 갖가지 길과 다르지 않다는 선사상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책이다.
『십현담 주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유마경』 번역, 그리고 소설창작으로 이어진 그의 사유와 글쓰기의 전 과정에서 보면 중간 단계 저서지만, 그의 생애에서 보면 3·1운동 후 삶의 기로 속에서 삶의 비전을 모색하는 가운데 만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십현담 요해』를 읽으며, 그 자신의 오랜 과제였던 선학의 중요한 결실을 보여준 저술이다. 한용운의 생애의 글쓰기에서 모든 저작이 중요하겠지만, 『십현담 주해』를 빼놓고 그의 선불교에 대해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