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이상 계속된 질문은 관료제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왜 ‘관료제와 시민사회’인가? 어색한 배열로 인식되는 두 가지 개념을 왜 꼭 함께 논의하는가? 이 책에서 ‘관료제’란 시민사회와 기업 부문에 대비되는 ‘정부와 행정’을 의미한다. 입법, 행정, 사법을 구성하는 정부 중에서도 특히 ‘행정’에서 계층제와 규칙을 바탕으로 하는 관료제의 특징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제가 능률적이고 민주적이라서 국민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관료제가 낭비적이고 국민에게 억압적인 기구로 작동한다면, 시민사회에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시민사회 역시 관료제에 대해 무책임한 비난만 일삼는다면 관료제도 난감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관료제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이해될 수 없고, 시민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논의해야 한다. 시민사회가 깨어 있어 적절하게 관료제를 통제하고 길들이지 못하면, 관료제는 어긋나게 작동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관료제 트릴레마’인가? 그동안 관료제를 공부하면서 관료제는 시민사회를 존중하고 협력하면 충분한 줄 알았다. 그러나 비효율적인 관료제는 시민사회의 짐이 될 수 있다는 현실에 직면했다. 독재는 관료제의 효율을 전제한다. 그러나 민주성을 잃은 독재정권의 관료제는 부패하고 낭비적이며 비효율적이다. 관료제를 중심으로 국가는 시너지를 발휘해 민주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관료제는 민주성을 잃고 효율도 잃어버리는 악순환에 빠진다. 그러므로 관료제는 기본적으로 효율적이라고 하는 전제를 버리고, 관료제를 둘러싼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관료제를 둘러싼 효율성과의 관계까지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관료제가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민주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2009년 9월 ‘관료제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관한 질문을 처음 던지면서 한국학술정보를 통해 고민을 이어갔지만, 이제 이 책을 ‘절판’하면서 새로운 관료제 패러다임을 전개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됐다. 그동안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정권 교체가 있었고,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지나 윤석열 정부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소수의 탐욕을 통제하지 못하면 대가를 치른다는 수많은 경험은 정부 관료제와 시민사회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관료제가 투명한 운영을 통해 시민사회와 협력하는 모습을 그려 낼 뿐만 아니라 관료제 자체의 효율성과 민주성 비판을 훨씬 신랄하게 진행해야 하는 부담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아래와 같이 크게 4부로 구성하고, 여기에 한 학기 강의 구성을 고려해 12개의 장을 나눠 실었다.
제1부에서는 관료제의 이론과 역사를 다뤘다. 제1장은 관료와 관료제의 의미와 시각 그리고 트릴레마(trilemma)를 다뤘다. 제2장은 관료제의 가치와 가치갈등의 문제를 다뤘다. 관료제는 합법적이고 능률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며, 민주적이고 공평해야 한다. 이러한 관료제의 가치들은 상호 작용하면서 시민사회의 숱한 적들을 양산해 내고 분쟁을 초래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국가라는 큰 틀 안에서 합의되고 조화되며 그리고 융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조건을 탐색했다. 제3장에서는 정부에서 나타나는 관료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정부의 구조와 그 안에서 활동하는 행위자들을 다뤘다. 제4장에서는 관료제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시각을 연구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서로 다른 모습의 석학들을 만나 보고자 했다. 석학들 중에서도 단연 합리적·합법적 근대 관료제를 탄생시킨 베버(Max Weber)를 중심에 놓고, 그 시대로 돌아가 관료제가 지닌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균형감 있게 살펴봤다.
제2부에서는 시민사회의 형성과 변화를 관료제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제5장에서는 시민사회가 도대체 무엇인지 탐구했다. 그리고 보통선거권이 보장된 상태에서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의 결합체를 시민사회로 일단 이해했다. 그리고 최근 논의되고 있는 심의민주주의를 소개했다. 제6장은 시민사회와 정부의 탄생 배경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사회계약론을 다뤘다. 시민사회와 정부의 탄생 배경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사회계약론은 정치철학적 요소가 많아 다소 난해하지만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개략적으로라도 소개했다. 이때 국민의 기본권과 이를 보장하는 통치구조로 구성된 지금의 헌법을 사회계약서로 이해하고, 정치철학자들이 구상하던 다양한 사회구성체의 모습을 음미하고자 했다. 제7장에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행위자들을 개괄하면서 비정부기구인 NGO를 다뤘다.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사회적 기업’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에 관한 논의도 피할 수 없어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담아내고, 새로운 사회운동의 흐름을 이해하고 이를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에 적용해 보고자 했다.
제3부에서는 관료제와 시민사회의 상호 비판을 넘어서는 협력의 과제를 도출하고 전망했다. 이론적 패러다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관료제의 트릴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과제를 도출하고 전망하는 내용을 결론에 담고자 했다. 제8장에서는 정부 관료제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 패러다임을 다뤘다. 행정조직과 그 속에 몸담고 있는 관료 그리고 시민단체를 포함하는 시민사회의 역동적인 모습에 대해 학습하고자 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사회자본(social capital)의 형성을 통해 시민사회의 신뢰와 협력을 받는 정부 관료제를 구축하는 일이다. 제9장에서는 이러한 논의의 결론으로서 ‘관료제와 시민사회의 협력적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제10장에서는 부산광역시의 금정과 용호라는 두 종합사회복지관의 총체적 품질관리(TQM) 운영 경험을 소개하면서 교훈을 찾아보고자 했다. 부산광역시 금정구종합사회복지관과 용호종합사회복지관의 성공적 경험은 비영리기관의 TQM 적용이 결코 어렵지 않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줬다.
제4부에서는 관료제의 트릴레마 대응 사례를 두 가지 다뤘다. 제11장에서는 지방정부의 관료제 혁신 패러다임을 부산광역시 사례에 적용해 봤다. 사실상 이 책의 종합이며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제12장에서는 2만 달러가 넘어선 경제 성장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지속하면서 한국 관료제가 강하고 효율적인 모습으로 지속 가능할 것인지 논증했다.
2009년 첫 출간된 『관료제와 시민사회: 비판과 협력의 이중주』가 2015년에 개정판이 나오고 2022년 절판에 이르기까지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한국학술정보 임직원분들께 감사드린다. 관료제에 관한 철학과 이론 부분은 저자의 짧은 지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워 다양한 전공을 배경으로 하는 선배와 동료 교수님들의 논의에 많이 의존했다. 그저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릴 뿐이다.
이제 『관료제 트릴레마』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판이 이뤄질 수 있도록 기획하고 출판을 추진해 주신 정재훈 윤성사 대표님과 임직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오랜 방황 가운데서도 늘 함께하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온전히 그 영광을 돌린다.
2023년 6월
저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