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풍요로운 서구 산업사회에서 일어난 중대한 변화
물질주의에서 탈물질주의로의 가치 전환을 연구한 책
이 책은 1977년 출간된 사회학의 고전이자 명저로, 1960년대 중반과 1970년대 초반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리며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유럽과 미국 사회가 겪은 의식의 변화를 연구한 것이다. 저자 로널드 잉글하트는 문화적 변화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당시 사람들의 주된 가치가 물질주의에서 탈물질주의로 전환되었음을 간파하고 이를 ‘조용한 혁명’이라고 칭했다. 이 책에서 잉글하트는 이러한 가치 변화의 양상과 더불어 가치 변화로 인해 정치 지형도 변화했음을 입증한다.
이 책은 광범위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다. 대규모 조사를 통해 잉글하트는 당시 서유럽과 북미의 젊은 세대는 자기표현과 삶의 질을 강조하는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는 경제적·신체적 안전을 중시하면서 물질주의적 가치를 보였던 그들의 부모 및 조부모 세대와는 달라진 양상이었다. 잉글하트는 이처럼 개인의 가치가 변화한 데에는 교육 수준 향상, 직업구조 변화 같은 일련의 사회경제적 변화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945년 이후 서구 국가가 장기간 풍요를 누리고 전쟁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탈물질주의적 가치가 출현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부유한 ‘개인’이 아니라 안전하고 풍요로운 ‘사회’였던 것이다.
가치의 변화는 정치 지형의 변화를 초래하고
정치 지형의 변화는 저항 세력의 변화를 초래한다
잉글하트는 탈물질주의적 가치가 출현하면서 정치의 초점이 경제 위주의 산업적 쟁점에서 라이프스타일 위주의 탈산업적 쟁점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질에 대한 관심이 저하되면서 이데올로기, 민족성, 생활양식 등이 점차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따라서 잉글하트는 신분 정치, 문화정치가 번창하고 계급정치는 점차 쇠퇴할 것으로 전망한다.
잉글하트에 따르면, 정치 갈등을 이루는 사회적 기반이 변화함에 따라 정치적 저항 세력 역시 새로운 세력으로 대체되는데, 이 새로운 저항 세력이 바로 탈물질주의적 세계관을 지닌 비교적 부유한 계급이다. 따라서 좌파정당은 이러한 신중간계급으로부터 새로운 지지를 확충하는 반면, 현상을 유지하는 정당은 점점 더 부르주아지와 전통적인 중간계급 및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것으로 예측한다.
잉글하트는 중간계급 급진주의가 경제적으로 부유한데도 불구하고 왜 현실의 변화를 추구하는가에 대해서도 해답을 제시한다. 잉글하트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달리 서구 국가들의 관습과 제도가 여전히 물질주의적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데 불만을 품고 있다. 따라서 탈물질주의자들은 기존의 질서를 틀 지은 엘리트에 대해서도 저항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잉글하트는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면 탈물질주의적 급진주의가 급속히 확대될 것이고 탈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이 확산되면 사회가 근본적으로 재구조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물질주의로 회귀하는 듯한 오늘날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잉글하트의 가치 변화 이론이 체계의 근본적인 변혁을 주창하는 급진적인 이론인 것은 아니다. 그는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초래한 사회의 풍요로움과 물질적 기반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더 나아가 서구의 경제성장을 이끈 기술혁신의 진보적 성격 또한 인정한다. 오히려 그는 ‘성장의 한계’를 우려해 세계의 인구증가 추세를 늦추는 것을 시급한 과제로 보았다. 왜냐하면 인구 과잉은 사람들을 물질주의적 가치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잉글하트의 이러한 전망에 의아할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는 극심한 경제 침체와 불평등으로 인해, 그리고 저출산 문제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21세기에 들어서는 계급정치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잉글하트의 테제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평가절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50여 년 전 출간된 이 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오늘날 젊은 세대가 출산을 거부하고 물질주의적 가치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현재의 물질적 상황과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가치 간에 너무나 큰 괴리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는 까닭은, 그들이 단순히 실리적인 물질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닌 탈물질주의적 가치가 경제 상황으로 인해 훼손되는 데 대한 분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사회의 여러 현상을 촘촘하게 증명하면서 탄탄한 분석과 전망을 제시하는 이 책을 통해 명저의 위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사회학의 중요성과 존재 이유를 다시금 깨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