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부터 환자들의 이야기를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다양한 사연들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환자들의 이야기를 언젠가 책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특히, 대학병원에서 교수가 환자 한 명에게 10분 이상 온전하게 할애할 수 있고, 환자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야는 아마 유방초음파검사가 유일할 것이다. 다른 분야는 진료시간이 짧거나, 시간이 길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환자가 말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초음파검사를 하는 내내 환자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검사를 시작할 때 ‘어떻게 오셨어요?’, “이전에는 어디에서 검사하셨어요?”라는 질문을 항상 하기 때문에 대화(?)의 물꼬를 틀 기회가 늘 존재한다. 검사실에 들어가기 전에 판독실에서 환자의 의무기록을 보고 병력이나 기왕력을 파악하지만 그래도 환자에게 매번 직접 묻는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대화를 하면서 환자의 긴장을 풀어줄 수 있고, 두 번째는 의무기록에 있는 것보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으므로 영상소견을 해석하고 판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 환자들의 이야기를 모으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수필 형식으로 책을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의료정책을 공부하다 보니 환자들의 이야기 이면에 있는 보건의료정책이나 복지정책의 불합리한 점들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2017년쯤부터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러나 조심스럽게 가족관계나 가정형편 같은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환자가 대답을 회피하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이야기를 잘 해주었다. 그래서 글의 형식을 수필이 아니라 환자의 이야기를 먼저 사례로 들고, 관련 제도와 상황을 설명하고, 연구보고서 등을 요약한 후, 필자가 평소에 생각하던 개선방향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글을 구성했다.
이 책의 주제는 다섯 가지다. 국민건강보험, 국가(유방)암검진, 인구고령화, 코로나19, 그리고 일부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 국민건강보험에서는 우리나라의 의료보장제도인 건강보험이 의료보장의 원칙을 전혀 지키지 않아서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는 것을 사례를 들어서 지적했다.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다다음세대까지 건강보험 혜택을 계속 누리려면 건강보험을 다시 건강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의료보장의 원칙(특히 최소 수준의 원칙과 포괄적 제공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설명했다. 즉 기본권의료를 제공하되, 이용자와 공급자가 도덕적 해이에 빠지지 않도록 건강보험의 범위와 대상자를 명확하게 재정의하고, 환자의뢰체계를 재도입하고, 요양기관 계약제로 전환해야 의료보장의 목적인 의료비 부담을 해소(건강보험 보장성 강화)할 수 있다.
두 번째, 국가암검진에서는 필자의 전공분야인 유방암검진을 사례로 들어 질관리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가장 먼저 유방촬영장비 숫자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장비품질관리를 실질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또한, 판독자인 영상의학과 의사에 대한 질관리가 필요하다. 이와 동시에 사후관리를 위해서 자가의뢰(Self-referral)를 하지 않는 1차의사를 확보하고, 환자의료체계를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유소견자들이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적시에 적절한 검사를 받을 수 있고, 최종적으로 조기진단을 통한 유방암 사망률 감소라는 국가암검진사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세 번째, 인구고령화 문제에서는 2025년부터 시작될 초고령사회를 대비하기 위하여 노인장기요양보험사업을 정비하고, 커뮤니티 케어를 도입해야 한다는 점을 설명했다. 특히 지난 정권이 시작한 한국형 커뮤니티 케어라 할 수 있는 지역사회통합돌봄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원래의 목적(의료비 절감)에 맞게 커뮤니티 케어를 올바로 시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커뮤니티 케어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간호법 제정 시도와 맞물려 있다. 재가환자에 대한 방문간호가 좀더 활성화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의학적 필요도가 아니라 환자의 수요에 따라 건강보험서비스가 제공되므로 의료이용이 괴다한 데다, 1차의사가 부재한 상황에서 간호법이 제정된다면 건강보험 재정이 감당하지 못한다. 즉 완치되지 않는 재가 만성질환자의 간호수요에 부응하느라 완치가능한 암환자들의 치료비에 쓸 돈이 부족하게 된다. 이것은 의료비 절감이라는 커뮤니티 케어의 목적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의료보장제도인 건강보험 자체를 붕괴시킬 것이다. 한편, 인구고령화와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연명치료에 대한 문제도 설명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삶을 마무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독자들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네 번째 코로나19 문제에서는 방역 및 백신접종 정책이 비논리적이고 강제적이었다는 점, 그래서 암사망률 증가와 아동학대 등 다른 방향에서 국민들에게 큰 피해를 끼쳤다는 점을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사회문제에서는 결혼이주여성과 그 자녀를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과, 정규직 전환의 그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상의학과 의사로서 필자의 회환을 고백했다.
대한민국이 지금보다 좀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건강이란 ‘단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안녕한 상태’다(Health is a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 그러나 현실에서 ‘건강’의 정의를 충족시키는 것-유토피아-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우리나라의 의료, 보건, 사회복지 정책에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이해함으로써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작업에 다같이 동참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