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현대 작가들 중에서도 아다니아 쉬블리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과 점령, 팔레스타인인 축출을 직접 겪지 않은 차세대 작가다. 따라서, 경험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현 상황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이전 세대와는 약간 다르다. 이전 세대의 작품에서 나크바 이전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향수, 나크바 이전 상태를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혁명적 열정 등이 두드러진다면, 아다니아 쉬블리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1948년의 대재앙 이후 계속되고 진전되어온 상황, 즉 폭력이 정상화된 21세기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적인 삶이다.
이런 초점의 이동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의 현대사를 보는 쉬블리의 관점도 이전 세대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이전 세대의 작품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민족 갈등과 팔레스타인인의 독립 투쟁이라면, 쉬블리의 경우 같은 소재를 다루더라도 그 갈등을 좀 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더 크고 근원적인 문제의 일부로 본다. 쉬블리의 관점에서는,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억압은 민족 대립도 종교 대립도 성별 대립의 문제도 아니다. 그보다는 현 상황의 바탕에 있는 문제는 모든 차이를 억압의 기제로 전환시키는 사고방식과 그런 태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체제다. 쉬블리는 그런 의미에서 팔레스타인의 현 상황은 민족이나 종교의 문제가 아닌 윤리적인 문제, 억압과 폭력의 현 체제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윤리적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
작품은 희생자인 소녀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소녀 편의 진실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 작품에 대한 한 인터뷰에서 쉬블리는 “염소도 다른 염소가 도살장에 끌려갈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데, 사람이 (동료 인간에 대해) 그걸 못한다는 말인가?”라고 항변하며, 자신이 하려는 것은 희생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도, 팔레스타인인의 고난을 증언함으로써 외부인을 설득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소한 일』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가해자인 소대장의 내면과 행위, 그리고 반세기도 넘은 후에 그녀의 진실을 찾아 나선 한 팔레스타인 여성의 내면과 행위다. 희생자의 목소리는 과거 속에 묻히고 사라졌으며 그것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다. 대신 이 작품은 1948년의 나크바, 즉 대재앙이 결코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왔고, 그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양성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호작용이 아니라 차이를 억압의 구실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체제의 산물이라는 것을 역설하며 이 사실은 결코 외면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쉬블리는 같은 인터뷰에서 어떤 화자가 같은 비극을 반복해 말한다면 청자는 지루하겠지만 화자에게는 비극적 상황의 증폭을 의미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작품의 미덕은 그 증폭된 상황의 근본 원인을 천착하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이 그 희생자가 될 수도 있고, 억압적 체제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