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이 본 옛 금강산
“일본과 중국의 서부 지역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산을 본 적이 없다.” (이사벨라 비숍, 영국, 1898)
“한때 동아시아에서 가장 경이로운 곳이었으나, 지금은 세계적으로 경이로운 곳 중 하나.” (찰스 어드먼, 미국, 1922)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보기 드문 산.” (스텐 베리만, 스웨덴, 1938)
지금은 갈 수 없는 땅, 금강산 만이천 봉. 금강산은 조선이나 동아시아에서만 이름난 명산이 아니라, 조선 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을 찾은 서양인들이 보기에도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환상적인 곳이었다.
구한말 1889년 주한 영국 부영사 찰스 캠벨이 금강산을 찾아 사진을 찍고 손수 그린 지도와 함께 영국 외무부 및 의회에 보고서(1892)를 제출한 것을 필두로, 일제시대까지 금강산을 찾은 서양인은 확인된 것만 영국·미국·독일·프랑스·캐나다·폴란드·이탈리아·오스트리아·스웨덴 등 9개국 출신(국적 미상 1명 포함) 출신 64명(단체 1포함)에 이른다. 『금강산(그들이 본 우리 29)』(김장춘·알렉산더 간제 지음, 살림, 2023)은 이들이 남긴 단행본·보고서·기고문 73건을 모아 간추려 소개한 책이다. 입수한 것만 영어·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웨덴어 6개 국어로 된 문건들 중 60건 가량은 그전까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백 년 전의 비구·비구니들과 행자들 모습, 6·25 때 소실된 장안사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포함해 거의 50장에 이르는 사진과 지도, 더러는 저자가 손수 그린 그림까지, 빛바랜 도상들이 금강산의 속살을 남김없이 보여 준다.
시간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책이 소개하는 저자들이 금강산을 찾은 것은 가까이는 근 80년 전, 멀리는 130여 년 전이다. 조선에서 대한제국, 일제시대를 차례로 거치며 금강산도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교통과 숙박시설의 확충으로 접근이 수월해진 이면에, 금강산과 주변과 사람들의 옛 문화가 사라져 가는 아쉬움도 문헌들엔 담겼다.
문헌들이 소개하는 금강산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시간의 장벽뿐만 아니라 언어의 장벽, 그것도 이중 장벽을 넘어야 했다. 일례로, 시대가 가까워 올수록 금강산과 주변의 지명·사찰명이 일본어 독음으로 변하고, 그것이 제각기 다른 유럽어로 왜곡된다. 일례로 장안사(長安寺)는 ‘조안지(Choanji)’가 되었고, 내금강(內金剛)은 ‘우치곤고(Uchi Kongo)’가 된다. 아예 ‘울음 연못’ ‘강아지길’로 번역된 것은 다른 자료를 뒤져 ‘명연담(鳴淵潭)’ ‘개잔령’임을 확인해야 했다.
수도사 노르베르트 베버가가 촬영한, 주지나 방장 스님일 법한 일행의 표정까지 생생한 사진 하나(46쪽)에는 절의 이름이 없다. 다행히 사진은 뒤편 대웅전의 “무단역무장, 수처현청황(無短亦無長, 隨處現靑黃. 정해진 길이도, 불변의 색깔도 없다)”라는 대련(對聯)까지 또렷이 담고 있어서, 이곳이 사명대사 유정(惟政)과 관계있는 건봉사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내금강 묘길상(妙吉祥) 사진들 중엔 불상의 좌우가 반대로 찍힌 것도 있는데(24쪽), 김홍도의 〈묘길상〉 그림을 토대로 어느 것이 뒤집어 인쇄된 것인지 판별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확보한 자료들
자료들 대부분은 명지대학교 LG한국학자료관(구 명지대-LG연암문고)에 소장된 것들이지만 10여 건은 이번에 처음 발굴되었다. 공저자 김장춘 교수(前 명지전문대 영어과, 명지대 LG한국학자료관 연구원)가 소개하는 일부 뒷얘기들은 한 편의 첩보물을 방불케 한다.
이탈리아인 조바니 마스투르치가 1925년 이탈리아 군사잡지에 기고한 글은 인터넷에 떠도는 서지사항 외에 실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래전 알게 된 이탈리아 현지의 한국인 여성과 극적으로 카톡이 연결되어, 무려 149번의 메시지가 오간 끝에 13쪽 분량의 이탈리아어 복사본을 입수할 수 있었고, 마침 이탈리어어를 전공한 가족이 있어 내용을 해독할 수 있었다.
서지사항만 입수한, 미국의 대학도서관들을 뒤지면 혹 나올 것 같은 정기간행물 기고가 5건 있었다. 책 제작이 거의 마무리될 쯤 마침 부인이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열리는 국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어, 동행한 길에 한국인 지인의 도움을 얻어 그중 4건의 실물을 확인하고 복제할 수 있었다.
‘그들이 본 우리’ 총서 완간
『금강산』은 한국문학번역원-살림출판사가 기획한 ‘그들이 본 우리 총서(Korea Heritage Books)’의 29권 째이자 완간(完刊)편이다.
‘그들이 본 우리’는 2008년 『임진난의 기록』(제1권, 루이스 프로이스 지음, 정성화·양윤선 옮김), 제5권 『세밀한 일러스트와 희귀 사진으로 본 근대 조선』(제5권, 김장춘 엮음) 등 7권으로 시작해, 16세기부터 일제하 20세기 중엽까지 세계인의 눈에 비친 ‘신선한 나라’ 조선의 모습을 되짚어 ‘오늘의 우리’의 원류를 되짚는 기획이었다. 국내 일반은 물론 학계에조차 알려지지 않은 서양 고서(古書)와 희귀본들을 상당량 소개함으로써 역사·인문·사회·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한국학 전반에 기여한 15년간의 장정이 막을 내린다.
▶ 〈그들이 본 우리〉 시리즈 소개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명지대-LG연암문고가 수집·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서 서양인이 남긴 조선의 기록만을 엄선하여 2008년부터 출간해온 국내 유일의 총서이다. 발간·미발간본 포함, 국내 다른 기관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있다. 이런 희귀본들이 국내에서 빛을 보게 되어 동북아 지역과 관련된 인문·사회·과학 분야 및 한국학 전반에 걸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단 한 종밖에 없는 도서를 찾아 전 세계 고서점을 뒤져 가격에 상관없이 수집했던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어 우리 문화와 학문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