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차림에서 보이는 신분과 문화
조선시대에 밥상을 차린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 재료는 어디에서 왔을까?
조선 사회에서 신분제도란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큰 기틀이었다. 그런 중요한 규율이니만큼 의식주에 있어 반상의 법도가 아주 엄격했고, 일상생활의 규범에서도 세세하게 정해진 방식이 있었다. 《조선의 밥상》은 궁중, 관청, 양반가, 중인가로 나누어 왕족, 양반, 중인의 밥상을 들여다보고, 그 작은 상 안에 담긴 법도와 문화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한다.
조선왕조에서는 18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밥·국·반찬 모두를 포함해 왕과 왕족은 7기, 양반은 4기, 중인은 2기를 차려 먹었다. 그렇다면 ‘그 밥상을 차린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궁중에서 왕족들이 직접 밥상을 차리지 않았음은 확실하고, 궂은일은 죄다 솔거노비에게 맡기었을 종가의 귀한 마나님들이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때고 있는 모습도 상상하기 어렵거니와, 더 나아가 사무역을 통해 양반을 뛰어넘는 부를 축적하여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던 잘사는 중인 집안의 여인들이 요리하는 모습도 잘 연상되지 않는다.
지체 높은 집안의 안채 부엌에서는 한 달에 거의 한두 번 꼴로 있는 제사에 올릴 음식과 사랑채에 든 바깥손님을 위한 음식 및 일상 음식을 만들었다. 제사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떡 치는 일은 물론 남자종의 몫이었다. 그 외에 솔거노비 중 통지기라는 여자종은 물통이나 밥통을 지거나 찬거리를 사 오는 여자종이었고, 대개 밥을 하거나 장 담그고 반찬을 만드는 여자종을 식모라 불렀으며 반찬 만드는 여자종을 찬모라고도 하였다. 한편 관아와 역의 부엌에서는 주방장 격인 총책임자 칼자, 그 바로 아래 부주방장 격인 국을 끓이는 갱자를 필두로 생선을 잡아 오는 사람, 채소를 기르는 사람, 꿩을 잡아오는 사람들이 소속되어 각자 식재료 공수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한 부엌 안에서도 여러 인원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 ‘음식’인 만큼, 《조선의 밥상》에서는 단순히 조선시대 음식의 종류와 음식 문화를 넘어 ‘사람’에게까지 집중하고 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음식문화
조선시대 풍속 음식을 통해 그려지는 당시의 풍경과
외식 문화 속에 녹아든 구한말 격변의 시대
고려시대서부터 조선 초기까지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처가살이혼이 언제부터 시집살이혼으로 정착되었을까? 사실 고려시대 때부터 시집살이혼으로 사회 관행을 변화시키려는 지도자들의 시도가 있긴 했다. 실제로 1349년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결혼할 때 북경에서 친영(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이하는 의식)함으로써, 시집살이혼의 서막이 올랐다. 그러나 고려 말의 개혁조치는 더 이상 그 빛을 보지 못하다가 다음 정권으로 이행되었다.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고구려 시대의 혼인은 물론 자유혼이었다. 이때 신랑집에서는 혼례 때 드는 잔치 비용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돼지와 술을 피로연에 소용되는 ‘이바지’용으로 신부집으로 보내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 이외의 폐물을 신부집에 보내는 것은 수치스러워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가부장제가 강화되며 시집살이혼이 완벽하게 사회에 정착하게 되고, 혼례 과정에서 준비되는 음식들과 그 음식을 사용하는 관례가 변화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그 변화한 관례들을 예식에 준비했던 음식과 더불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 《조선의 밥상》에서는 조선시대의 외식 메뉴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그 묘사들이 무척 생생하고 자세하여 흥미롭게 다가온다. 장시에서 판매하는 국밥을 이야기하면서 서술된 그 앞에 꽂아 놓은 소머리와 밥을 먹으면 숙박까지 가능했던 주막의 풍경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경하기까지 하다. 책에서는 구한말 궁중음식을 술안주로 선보인 요릿집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한일병합 이후 세워진 조선식 요릿집의 대표 격인 ‘명월관’을 그 예로 들고 있다. 명월관은 궁내부 주임관 및 전선사장으로 있으면서 어선과 향연을 맡아 궁중요리를 담당했던 안순환이 1909년 지금의 세종로 동아일보사 자리에서 문을 연 곳인데, 그해 관기 제도가 폐지되고 기생조합이 생겨남에 따라 일본 요릿집에 게이샤를 두듯이 자연스럽게 관기들이 명월관에 모여들었다. 이에 따라 궁중요리와 관기들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조선의 밥상》은 이렇게 역사의 사건과 흐름 속에서 우리 음식문화의 변화 원인을 논리적으로 도출하여 자세한 예로써 설명하고 있다.
조선의 밥상에 오른 음식들은 어떻게 전수되어 왔을까?
다양한 음식의 종류와 함께 알아보는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앞서 이야기했듯이 지체 높은 집안의 여성들은 주로 집안의 음식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하며 직접 손에 물을 묻히진 않았던 듯하다. 그렇다면 집안마다의 특색 있는 음식들과 가양주의 제조법은 어떻게 전수되어 왔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조리서라 불리는 『음식지미방』은 다른 이름으로 ‘규곤시의방’이라고도 한다. 이는 ‘규방에 거처하는 부녀자가 쓴 책’이란 뜻이다. 이 외에도 『주식시의』나 『규합총서』 등과 같이 안주인이 쓴 필사본 조리서가 등장한 것은 며느리에게 술과 술안주를 포함한 집안 내력 음식에 대한 조리비법을 전하려는 시어머니들의 노력의 결과라 생각된다. 아울러 우리는 이와 같은 책을 통해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즉, 비록 집안의 궂은일은 노비들이 도맡았지만 안주인 역시 조리법을 완전히 터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조선왕조에서는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를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적어 책으로 남겼다. 그것이 바로 ‘의궤’인데, 《조선의 밥상》에서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된 것을 토대로 조선시대 궁중 밥상(수라)에 올랐던 주식류, 탕류, 찜류, 구이류, 젓갈류, 나물류를 포함하여 회, 버터(수유), 포와 다식 같은 음식과 유밀과, 떡 등의 간식과 술, 계절별·절기별로 먹었던 풍류 가득한 음식까지 두루 소개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 살면서 숱하게 먹어 온 자연스러운 식단부터,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생소한 음식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는 《조선의 밥상》.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음식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가끔은 책에 기술된 시기와 절기에 따른 음식들의 의미를 곱씹으며 챙겨 먹어 보는 것으로 옛 풍류를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