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기존 관념을 뒤엎다
“플롯을 원하면 댈러스(70년대 미국 인기 드라마)를 보겠다.” 엘리자베스 하드윅이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잠 못 드는 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전형적인 플롯의 부재다. 기억과 사유, 상상, 인용문, 편지 등이 조각조각 모여 콜라주를 이루며 화자의 삶과 주제를 드러내는 이 작품은 로렌 그로프가 서평에서 말했듯이 전통적인 소설보다는 한 곡의 음악을 상기한다. 같은 인터뷰에서 하드윅은 『잠 못 드는 밤』의 구상은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이제 소설을 쓰려고 하는데 화자를 ‘나’라고 부를지 ‘그’라고 부를지 모르겠다.” 하드윅은 결국 ‘나’를 택하고 화자에게 자신의 이름 엘리자베스를 붙이는데, 이것은 화자가 ‘나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나의 언어로 자유롭게 회고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삼인칭시점으로 쓰였지만 저자의 이야기라는 것이 분명한 소설들과 전혀 다른 접근인 것이다. 이 작품은 소설이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에세이, 산문시, 메모어 등 다양한 장르와 접목되면 문학의 세계가 얼마나 다채로워질수 있는지 보여준다.
기억이라는 허상에 삶의 정수를 담아내다.
소설 도입부에서 화자는 기억을 과제로 삼아 이 삶을 계속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기억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변하고 편집되고 왜곡되는 허상이다. 그런데 이 허상은 바로 우리가 이해하는 지금까지의 삶이다. 이것은 자기 정체성의 기반이 되고 현재와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화자가 말한 대로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나가려면 그에 앞서 이 허상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어떤 기억을 돌이켜볼 것인가? 화자는 “선반에서 캔을 꺼내듯”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바로 다음 순간 의미심장한 단어 ‘아마도’로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으며, 우연히 길에서 주워들은 한마디가 수차례 되풀이한 대화보다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어떤 기억이 ‘사소’하고 ‘중요’한지는 결국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화자는 자신의 기억을 마치 관찰자처럼 감상이 배제된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지 그것의 사실 여부를 밝히려들지 않는다. “때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쥐고 있는 내 삶의 어휘집이, 사실관계의 색인이 끔찍하다. 다들 여벌의 쌍안경처럼 꼭 쥐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이 내 기억을 방해한다는 말이다.” 화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기억 그 자체인 것이다. 현재의 엘리자베스가 과거의 엘리자베스가 관찰한 바를 새로이 관찰하는 것이며, 저자와 화자의 시선과 목소리가 하나로 녹아든 이야기 속에서 독자는 타자에 대한 연민과 상실에 대한 애도라는, 삶의 정수를 체험한다.
타자에 대한 연민과 상실에 대한 애도
『잠 못 드는 밤』에서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화자가 자신이 회상하는 인물들에게 보이는 깊은 연민과 공감이다. 화자가 기억하는 대상은 대부분 여성인데, 각자 자기만의 불행을 안고 처절히 살아간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매춘을 하다가 지독한 염증과 통증으로 죽은 이웃 아가씨. 불도저처럼 밀어닥친 가난에 모든 것을 잃은 동네 음악 선생, 학대의 기억과 질병을 안고 사는 조젯, 살아 있으니 다른 사람의 빨래를 해주고 있을 것이 분명한 아이다. “그저 늙어 낙오한 소처럼, 그 누구의 부양도 없이, 끔찍한 자유 속에서 방황”하는 여자들. 비운의 스타 빌리 홀리데이를 제외하면 이들은 화자가 기억해주지 않았으면 세상에 자취를 남기지 못했을 여자들이다. 이들을 기억하기로 한 화자의 ‘결정’을 통해, 또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독자는 엘리자베스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고 이해한다. “어쩌면 여기서 시작된 걸까, 반복되는 실수와 나태의 희생자를 향한 호기심 섞인 연민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가라앉는 생, 연처럼 부드럽고 천천히 낙하하는, 아니 격렬한 추락과 함께 산산이 조각나는 생을 향한 연민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하드윅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 소설의 화자는 관찰하는 사람입니다. 관찰하기로 결정한 대상을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처절하게 살아가는 거리의 망가진 여자들, 청소부, 미드타운 호텔의 한량들 등 온갖 종류의 패배자들과 무의식적으로 공감한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 나는 저들과 다름없다고.” 그들의 상실과 고독과 처절함에 보이는 연민은 결국 엘리자베스 자신의 삶으로 귀결된다.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삶과의 연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법이고, 홀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한 『잠 못 드는 밤』은 아끼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은 소망으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