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ᄫᅳᆯ의 오래된 미래
서울의 어원은 《용비어천가》에 처음 언급된 “셔ᄫᅳᆯ”이다. [셔블] 정도로 발음할 수 있는 이 말은 지금까지 이어져 “서울”이 되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도심’이자 ‘수도’로서의 역사에만 집중해도 600년에 이르는 서울은 많은 것들을 품고 있고 품어왔던 도시다. 하지만 식민과 독재라는 격심한 현대사의 격랑 및 산업화 속 ‘자연화된 개발주의’에 도달한 현대 한국사회에서 크게 훼손된 서울의 모습을 볼 때 “역사 도심”이라는 말은 왠지 와닿지 않는다. 현직 건축사이자 도시 건축에 대한 역사적, 인문적 탐구를 이어온 작가 전상현은 이제라도 서울의 역사적 풍모와 역사 경관 고유의 매력을 현대적으로 되살려 나가자고 호소한다. 늦은 듯 보이지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목표지점을 향한 전투적 자세”가 아니라 “성찰”을 향한 “태도의 전환”을 모색할 기회라고 말한다. “쉬운 게 하나도 없는 일”이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늑함”이라는 풍경 유전자를 소유했던 서울의 고고했던 모습은 현대적으로 계승되어야 할 오래된 미래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서울의 역사 풍경과 사대문 도심
1장(서울의 역사 풍경)에서는 조선 시대 ‘한양’이 수도로 조성되는 과정 그리고 아늑함과 조화로움을 도시적으로 구현한 ‘우리네 건축과 풍경’의 특징을 살폈다. 2장(사라진 풍경 도시)부터는 역사 도심의 핵심 ‘사대문 도심’을 들여다본다. 사대문 도심의 풍경이 총체적으로 어떻게 훼손되었는지, 이른바 “탈풍경”을 일으킨다고 지적받는 주요 대형 건물들의 경관적 문제점들을 짚어본다. 3장(관성의 저항, 남산 풍경)에서는 남산을 중심으로 서울 풍경의 역사를 살핀다. 일제와 해방 후 독재정권의 행태들로 “능욕”과 훼손을 수없이 겪은 남산의 수난사와 1990년대 이후 서울시 중심으로 이루어진 풍경 복원 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짚었다. 또한 최근의 힐튼호텔 재건축 이슈를 중심으로 현대 건축 유산의 건강한 거취 방향으로서의 “부분 보존”이라는 해법도 살펴본다. 4장(미약한 행보, 광화문 풍경)에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서울을 살핀다. 특히 국가상징 경관으로 정치적, 상징적 의미가 컸던 광화문 일대가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던 과정과 1990년대 김영삼 정부가 이를 복원하면서 일으킨 ‘부정 유산’(조선총독부 청사)에 관한 논쟁들을 다시 되짚어보았다. 그와 함께, ‘기억’을 중심으로 지금 다시 광화문 일대를 ‘역사’와 ‘민주주의’가 융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의견들을 개진하였다. 5장(머나먼 여정, 사대문 도심의 정체성 회복)에서는 “역사 도심을 역사 도심답게” 만들어 매력과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부딪혀야 할 현실적 난제들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 의식적 관점에 대해 정리했다.
새로움에 대한 집착, 자연화된 개발주의를 폐기하라
일제는 서울의 도시 건축 미학의 원리를 훼손하고, 철저하게 지배를 위한 정치적인 조형 원리를 도입했다. 독재정권(특히 이승만과 박정희)은 이를 따라 배웠다 할 정도로 극심하게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서울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의 풍경은 얼마든지 훼손되어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 통일적 전망이 파괴된 자리에는 권력과 자본에 의한 “개발”만 우뚝 서게 되었다. 또한 후발 주자의 콤플렉스는 새로움에 대한 집착이 되어버렸다. 이는 사대문 도심조차(서울 전체 면적의 2.9%) 전혀 보존하지 않았을뿐더러 서울 전체를 품격 없는 개발주의 중독의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형태와 높이, 마감이 제각각이고 어떠한 질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무턱대고 솟아오른 이기적인 고층 건물들(빌딩과 아파트)로 인해 능선은 붕괴하고 “충돌과 부조화”가 만연한 지금의 풍경이 도래한 이유다.
양질의 풍경, 시민의 민주주의를 향하는 역사인문 건축사의 도시 이야기
이러한 상황에서 “오래된 미래”로의 귀환은 가능할 것인가? 풍경의 회복을 위해서는 점진적이더라도 결국 고층 빌딩과 아파트들의 ‘높이’를 제한해야 한다. 이는 당장 ‘효율성’과 ‘재산권’, 이른바 ‘부동산 가치’를 하락시킨다는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고고한 비판’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충분히 이를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첩첩산중 속 한걸음이 역사 도심의 숙명입니다. 방향이 맞다면 느리더라도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의 책무입니다. 사대문 도심은 그것만의 독특한 지형과 역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은 서울 시민 혹은 한국인 전체를 위해 조화롭게 발전하기보다는 몇몇 개인과 소수집단,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맹목적으로 개발되어왔다. 그 결과 풍경은 훼손되거나 소수의 독점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도시의 건축 그리고 풍경에는 인간 집단의 삶의 기억인 역사가 깊게 배어 있고 결국 이는 다수 시민에게 계승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늘도 “규제 완화”를 외치는 서울 그리고 한국에서, ‘시민의 풍경’을 위해 이야기를 풀어내며 변화를 말하는 역사인문 건축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