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에게 내려진 제1의 명령
‘평화를 추구하라’
홉스를 대표하는 개념으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리바이어던’이 있을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절대 권력인 리바이어던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자칫 홉스의 사상을 절대 권력에 대한 무비판적인 옹호로 잘못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 따라서 홉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밑그림을 보아야 한다.
홉스가 말하는 절대 권력의 핵심은 자연상태, 자연법, 사회계약론이다. ‘자연상태’는 홉스 정치론의 출발점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짧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자연상태는 통치자가 없는 무정부 상태로서, 자기 보호라는 존재 목적을 확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는 자연상태에서도 천부적인 자연법은 존재하는데, 이러한 자연법에 따라 누구든 자기에게 위협적인 대상을 제거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보장되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홉스는 여러 개의 자연법을 열거하면서도 제1의 자연법으로 ‘평화를 추구하라’는 명령을 꼽는다. “이성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선을 위해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한 평화를 추구하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홉스의 사상은 ‘사회계약론’으로 이어진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따른 최악의 결과인 공멸을 면하기 위해서는 자연권의 상당 부분을 상호 양도해야 하며, 양도된 권리들을 제3의 공동 권력자, 즉 통치권자에게 양도하는 계약을 맺어야 한다. 계약을 통해 신민은 통치권자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의무가, 통치권자는 신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호할 의무가 발생한다. 정치적 계약의 최고 목적은 보호와 복종의 안정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통치권자의 안정적인 권력 확보는 오직 계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런 경우에만 통치권은 절대적 힘을 지니게 된다. 홉스를 절대왕권론자로 규정하는 데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 토대에는 사회계약론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통치권을 절대화한 목적은, 즉 리바이어던의 존재 목적은 안정적인 통치권의 확보와 이를 통한 평화의 보장에 있다.
전쟁의 상흔이 낳은 리바이어던
『법의 기초』에서 시작되다
사람은 시대의 산물이다. 사회적 경험은 때때로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 상흔은 한 사람의 삶이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영국 시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프랑스로 망명한 홉스는 외국에서 조국의 혼란을 바라보며 내전 이후 새로운 나라의 기초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고민했다. 망명을 떠나기 직전인 1641년에 필사본으로 만든 『법의 기초』를 주위 지인들에게 돌려 보게 한 것은 내전으로 치닫고 있던 당시의 급박한 정치 상황과 이를 보는 그의 초조함이 담겨 있다. 이는 왕권주의와 의회주의의 충돌 와중에 왕권주의를 옹호하는 자신의 글을 대중에게 알리기보다는 왕권주의 성향의 소수 엘리트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개함으로써 상대편의 공격을 최소화하는 전략적 선택일 수 있다.
『법의 기초』에 이어 홉스는 두 번째 정치론으로 『시민론』을 내놓았다. 『법의 기초』가 초고 형태로 회람된 이후 1641년 11월경 홉스는 프랑스로 망명길에 올랐고, 그 이듬해인 1642년 4월 파리에서 라틴어로 쓴 『시민론』을 발표했다. 시간상 얼마 되지 않는 간격을 두고 두 권의 정치론을 발표하고, 9년 뒤 그는 대표작인 『리바이어던』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시민전쟁이 임박했을 때, 그리고 프랑스로 망명을 간 직후에 연달아 내놓은 홉스의 두 저술과 10년의 망명 생활을 정리하며 시민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난세를 바로잡을 새로운 통치권자의 이상을 담은 『리바이어던』은 혼돈의 시대가 낳은 작품이다.
근대 정치사상가로서 홉스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읽는 작품은 대부분 그의 대표작 『리바이어던』인데,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리바이어던』은 독립적인 작품이 아니다. 『법의 기초』와 『시민론』이 없었다면 『리바이어던』은 지금 우리가 보는 정도의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기본 구조와 중요 내용은 대부분 『법의 기초』나 『시민론』에서 이미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