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철학을 자유로이 오가는
무한한 신들의 여행 속으로
분리되어 버린,
드러난 세계와 감춰진 세계
이 책은 유라시아 신화 속의 신들과 이들을 소재로 한 조형예술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신화 이야기는 아니다.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을 논한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이 책은 신화와 예술을 넘어선, 그 이면에 숨겨진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것은 문화예술의 현상세계 이면에서 그것들을 움직여 가는 세계, 즉 드러난 세계와 감춰진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드러난 세계가 삶의 영역에 해당한다면 감춰진 세계는 삶의 원리에 대해 묻는 철학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과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로 공존하는 세계이지 결코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임에 틀림없는 철학과 삶은 웬일인지 상호 간에 분리되어 까마득히 멀어져 버렸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서로 다른 세계의 언어로 이야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한없이 멀어진 이 둘을 화해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본래의 모습 그대로 이 둘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까?
‘유목미학’
삶과 철학을 이어 주는 감성의 다리
이 책은 ‘유목미학’(Nomadic aesthetics)의 원리를 적용해 드러난 세계와 감춰진 세계의 이야기를 함께 풀어 나간다. 유목미학은 들뢰즈의 유목론(Nomadology)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유목론은 규정된 공간의 질서를 재현하는 정주민과 달리 미규정의 공간에서 스스로 다양한 형태의 영토를 창조해 가는 유목민에 빗대어, 전통적 재현의 논리에 맞서는 창조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처럼 감성의 영역에서 철학적 사유를 구현하고 있는 유목론은 그 자체로 유목미학의 모티브가 되었고, 유목미학은 이러한 들뢰즈의 유목론을 이론적 뼈대로 하여 고안되었다.
유목미학은 일반적으로 미학(Aesthetics)에서 다루고 있는 미(美)와 예술에 관한 담론이 아니다. 미학은 본래 철학의 한 분과로서 감성인식의 영역을 담당해 왔으나, 유목미학은 인식에 있어 감성인식의 영역에 주목하되 이를 독립적인 미학의 영역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유목미학은 마치 분절된 영역을 자유로이 횡단하는 유목민처럼 추상적인 철학의 세계와 구체적인 삶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이들을 연결하는 ‘감성의 다리’ 역할을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어떤 이유로 한없이 멀어진 철학과 삶을 이어 주는 접속의 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차이를 생성하는
신들의 유목 여정을 따라가다
하나의 생명이자 하나의 몸임에 틀림없는 철학과 삶이 본래의 모습으로 상호소통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부단히 스며들어야 하며, 또한 서로의 언어를 사용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유목미학은 다양한 추상적 개념과 원리들을 끊임없이 삶 속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다른 한 편으로 다양한 삶의 현상으로부터 끊임없이 개념과 원리를 뽑아 올리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처럼 삶의 영역과 철학의 영역이 마블링 되어 흐르는 유목미학의 글쓰기 방식은 구체적인 적용에서부터 창조적인 변용에 이르기까지 무한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목미학의 적용 범위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되며, 『신들의 여행』은 그 이야기의 첫 시작에 해당된다.
이 책의 1부 「차이를 만든 접속: 신들의 변신」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이후 전개되는 문화의 접속에 초점을 맞추고, 접속에 따라 변화되는 문화의 제 양상을 추적해 간다. 먼저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정복지 곳곳에 그리스 문화를 이식하는 과정을, 다음으로 현지 문화와 접속하여 변화를 겪고 새롭게 재탄생하는 현상들을 신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남겨진 조형예술을 통해 차례로 살핀다. 그 공간적 범위는 동방원정 이후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페르시아와 인도 북부의 간다라 지방, 더 나아가 실크로드가 열린 이후로 전개되었던 중앙아시아 타림분지와 중국·한국·일본의 동아시아 삼국에 이른다. 즉, 1부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로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유입된 그리스 신들의 변신을 주요 테마로, ‘만남과 접속에 의한 차이의 생성’이라고 하는 문화의 속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삶과 철학의 접속
‘새로운 미학’의 길을 열다
1부가 ‘드러난 세계-삶의 영역’에 해당한다면 2부 「들뢰즈 철학으로 만나는 신들의 변신」은 1부의 내용 전반에 대한 철학적 읽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컨대 삶의 영역이 신체의 맨 바깥 부분인 살에 해당한다면, 삶의 이면에 감춰진 철학적 원리는 신체의 제일 깊은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신체에 있어 살갗은 외부로 드러나 있어 오관(五官)에 잡히지만, 뼈는 신체를 해부해서 살을 발라내지 않는 한 오관으로 감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늘 삶 속에 내재해 있지만,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추상의 세계에 속하므로 일상적으로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 책의 2부는 마치 혈관을 통해 흐르는 피가 살과 뼈를 관통해서 순환하듯, 삶의 영역인 1부와 그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철학의 원리를 가로지르며 소통한다. 바로 유목미학이다.
이처럼 철학과 삶이 상호 소통하는 유목미학의 원리는 필연적으로 감성의 영역에서 구현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유목미학은 철학적 개념들을 감성의 영역에서 이해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다시 말해 삶 속에 숨겨진 철학적 개념들을 삶의 표면으로 끌어올려 오관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감성의 영역이 세상을 홍수처럼 뒤덮어 충만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이 감성의 시대에, 철학 역시 속도를 잃지 않고 계속 흐를 수 있는 물길을 터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유목미학의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