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지학자 레비스트로스의 명저,
『슬픈 열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들
『슬픈 열대』라는 책은 그 제목에서부터 비범함을 내뿜고 있다. 마치 한 편의 소설 작품의 그것과도 같은 이 작품의 제목은 우리를 여러 차례 생각에 빠지게 한다. 먼저, ‘열대가 어떻게 슬플 수 있는가’가 첫째이다. 물론 이러한 제목을 단순한 비유로, 즉 문학적 비유로만 생각하고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생각해 보면, 이 열대가 의미하는 것이 단순히 지역으로서 열대가 아니며, 그 열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문화 등 다양한 것을 ‘열대’라는 이름으로 상징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마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열대는 도대체 왜 슬픈 것인가’일 것이다. 만약 열대가 -그것이 단순 열대를 의미하는 것이든, 혹은 그 안에 많은 것을 내포한 상징으로서의 열대를 의미하는 것이든- 슬프다면, 분명히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또 열대는 ‘정말로’ 슬픈 것일까? 이런 생각을 거치고 나면 마지막으로는 한 가지 물음이 들 것이다. 당최 레비스트로스는 어째서 책 제목을 “슬픈 열대”로 지었단 말인가? 혹은 어째서 책 제목을 “슬픈 열대”로 지어야만 했다는 말인가? 레비스트로스는 이 마지막 생각과 관련이 깊어 보이는 문장으로 자신의 책, 『슬픈 열대』를 시작하고 있다.
〈center〉“나는 여행들과 탐험가들을 증오한다(Je hais les voyages et les explorateurs).”〈/center〉
만약 레비스트로스가 자신이 고백한 것과 같이 “여행들과 탐험가들을 증오”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저서를 이러한 말로 시작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중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레비스트로스는 어떠한 이유로 여행들과 탐험가들을 증오하는 것일까? 그 증오의 원인은 통속적인 여행들과 그것을 행한 탐험가들이 자신이 여행한 지역과 그 지역의 사람들을 타자화시키는 방식에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증오하는 여행들과 탐험가들이란 타자와 타 문화를 자신과의 차이로써만 규정함으로써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이국적인 풍경만을 강조하는 종류의 것이다. 이러한 여행들과 탐험가들은 잘못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통속적인 여행들과 탐험가들이 잘못되었다면, 그래서 그러한 여행들과 탐험가들이 아닌 진정한 여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떠한 것’은 ‘어떠한 것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증오 표현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어 가는 것이다.
〈center〉“그러니 곧바로 나는 서둘러 나의 탐사를 이야기하려 한다(Et voici que je m’apprête à raconter mes expéditions).”〈/center〉
레비스트로스는 과연 자신의 탐사를 통해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려 하는 것일까? 이 책,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읽기』의 저자는 “몇 개의 단락이나 장이라도 좋으니 직접 읽고 느껴 보”라고 권한다. 물론 이러한 저자의 권유가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권유에는 『슬픈 열대』가 품고 있는 문학적 향취를 독자들이 함께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이 담겨 있다. 그만큼 『슬픈 열대』는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안내서는 도대체 왜 읽어야 하는가?” 하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직접 읽고 느껴 보는 것이 중요하다면, 직접 읽어 보면 그만 아니겠는가. 하지만 『슬픈 열대』는 쉽사리 읽어 보기에는 아주 방대한 책이다. 그리고 그 책에는 그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많은 주제와 사유가 담겨 있다. 방대한 지역을 탐험할 때는 지도가 필수적이듯이, 이처럼 방대한 저서를 탐독할 때도 그에 맞는 안내가 필요한 법이다. 이 책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로 탐험을 떠나기 위한 좋은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