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개인과 민족, 인류의 정신에 각인된
태초 흔적을 담고 있는 지혜의 보물창고다”
수메르, 이집트, 동아시아(한국-중국-일본)를 거쳐 그리스, 북유럽 신화까지
전 세계 신화를 정신분석학, 인류학, 민속학으로 해석한 국내 최초의 시도
매혹적인 이야기와 무수한 상징, 불멸의 존재들과 가혹한 운명에 맞서는 영웅들. 수천 년간 인류에게 마르지 않는 상상력을 제공해온 신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 본성을 이해하고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최고의 텍스트이다. 신화가 품고 있는 복합적인 상징과 은유는 종교, 철학, 예술, 과학 등의 학문에 깊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이는 정신분석학도 마찬가지다. 프로이트가 창안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비롯해 정신분석학의 핵심 이론과 은유에는 신화 속 등장인물인 프시케와 에로스, 나르키소스 등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화와 정신분석》은 정신분석가 이창재가 전 세계 여러 민족의 주요 신화들을 정신분석의 관점으로 새롭게 읽고 해석한 책이다. 저자는 프로이트, 융, 현대정신분석학(라캉, 클라인 등) 이론들을 활용해 수메르, 한국, 중국, 일본, 이집트, 그리스, 북유럽 각 민족의 창조신화 및 영웅신화 20편에 담겨 있는 상징 의미들을 풀어냄으로써 인간 정신의 심연에 접촉하는 ‘정신분석적 신화 해석’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정신분석학에만 그치지 않고 신화학, 인류학, 민속학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접근법을 통해 신화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사실, 서양의 경우 신화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은 꾸준히 시도되어왔지만 국내의 경우 정신분석을 환자의 병 치료가 아닌 개인과 민족의 내면세계를 밝히는 도구로 수용한 역사는 매우 짧다. 게다가 고전적 정신분석학과 그 이후 여러 갈래의 이론들을 아우르지 못하는 한계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화와 정신분석》은 지금까지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각 민족의 특수한 정신성과 인류 보편 정신에 가라앉아 있는 ‘초시간적 무의식’을 ‘지금 여기’에서 밝혀내는 국내 최초의 시도라 할 수 있다.
고대의 신화적 사고와 현재의 삶이 공명하는 체험
‘신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현대’라는 독특한 문화와 생활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과학적 합리성에 바탕을 둔 사고 체계와 전혀 다른 체계에 접속하여 인생의 본질과 목적, 현실의 곤경과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 등을 거시적으로 음미하는 작업이다. 신화 속에는 수천 년 전 인류의 정신에 각인된 강렬한 체험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것은 민족마다 다른 정신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현대인이 겪는 복잡다단한 심리적-정신적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화에 저장되어 있는 인간 정신의 심연(인류무의식)과 접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의식과의 접촉을 통해서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와 융이 제공한 이론적 틀, 즉 꿈을 해석하고 무의식에 접근하는 방법을 통해 고대인의 신화적 사고와 현재가 공명하는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정신분석 작업을 통해 신화 속에 투사되고 반영된 각 민족의 무의식, 즉 억압된 소망, 분열된 정신 요소, 불안과 방어 유형, 무의식적 환상, 대상관계 양태, 자기 상태를 생생히 지각하고 밝혀낼 수 있다. 신화의 주제 및 서술 관점이 어떻게 반복되고 변화되어왔는지 인류사의 거시적 차원에서 이해하게 되면 현재 우리가 지녀온 ‘신 관념’과 ‘인간 이해’가 어떠한 시대적-사회적 특수성과 한계를 반영하고 인류 차원의 공통성을 재현하는 것인지 조망할 수 있게 된다.”(10-11쪽)
이 책은 일차적으로 프로이트의 개인무의식, 융의 집단무의식, 현대정신분석의 여러 관점들을 상호 보완하면서 신화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러나 신화와 정신분석학을 일대일로 호응시켜 평면적인 해석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정신분석학의 관점 외에도 신화 속 영웅들의 정신 발달 과정을 구조화(분리-입문-귀환)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관점,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주술적 사고’와 ‘왕 살해’, 심리학자 줄리언 제인스의 ‘양원적 정신’(신의 목소리를 듣는 뇌) 등과 같은 개념들을 활용해 신화 속 상징을 더욱 깊이 읽어내고 고대 인류의 세계관에 입체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신화 속에 숨겨진 인간 정신의 본질에 접촉하다
신화 속 영웅들의 일대기는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인간 유형의 본질을 드러내는 보편 상징이자 거울이다. 이 책의 핵심에 해당하는 2부 ‘신화와 정신분석’에서는 수메르, 한국, 중국, 일본, 이집트, 그리스, 북유럽 각 민족의 창조신화를 포함해 20개의 영웅신화를 다룬다. 신화마다 등장하는 수많은 상징들, 신과 영웅의 일거수일투족을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들이 솟아난다. 가령 각 민족의 창세신화를 통해서는 동서양 세계관의 차이(조화로운 우주 대 경쟁과 살해)나 한-중-일 세 나라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정신성에 대한 거시적 이해가 가능하다. 반면에 불행한 정신 상태에서 가혹한 시련과 통과의례를 거친 뒤 성숙한 정신성을 갖추게 되는 영웅들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개인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태도를 배울 수 있다.
“꿈을 통해 억압된 무의식에 접속할 때마다 ‘잠재된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강렬한 체험을 하듯이, 이 책은 전 세계의 독창적 신화를 매개로 각 민족 내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민족정신의 섬뜩한 시련과 치열한 발달 흔적을 마주할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를 통해 각 민족의 바탕에 있는 자부심과 콤플렉스가 무엇인지 온전히 교감하게 되면 그때마다 독자의 정신 영역은 드넓게 확장될 것이다.”(4-5쪽)
신화는 각 민족 구성원들에게 위기와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 인간의 본질과 삶의 목표 등을 안내하고 흐트러진 정신을 응집시켜주는 최고의 ‘치유적 서사’였다. 저자는 정신분석이라는 도구로 신화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우리 정신의 밑바닥에 있는 태곳적 무의식과 ‘지금 여기’에서 교류하는 경이적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신화와 정신분석》은 수천 년 전 인류가 지녔던 욕망과 감정, 뿌리 깊은 상처와 재난의 흔적, 생존을 위해 유념해야 할 다중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는 신화를 더욱 생생하게 ‘체험’하는 기회를 선사한다.
* 이 책은 2015년 ‘학술연구지원사업 교육부장관상’, ‘세종도서 학술부문’에 선정된 《신화와 정신분석》(아카넷, 2014)의 구성과 내용을 전면 수정-보완한 개정증보판이다. 기존 책의 오류를 바로잡고 문장을 새롭게 교열했으며, 일부 신화에 대한 해석을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