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축일기(癸丑日記)》
〈계축일기〉의 작자는 인목대비의 나인이라는 설이 통설로 되어 있으나, 그 문체와 사실 등으로 볼 때 인목대비가 직접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
선조 8년(1575), 심의겸과 김효원의 하찮은 감정 대립이 사색당쟁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고질을 낳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더욱 치열해진 이 싸움은 왕위 계승문제와 뒤엉켜 엄청난 비극을 낳게 하는데 〈계축일기〉도 그러한 비극 중 하나를 다루고 있다.
인목대비는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선조의 초비(初妃) 의인왕후 박씨가 선조 33년에 승하하자 2년 후 열아홉 살에 선조의 계비가 되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 의(蟻)를 낳았다. 당시 의인왕후 박씨는 혈육을 남기지 못했고 후궁들의 몸에서 난 자녀 중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 휘(輝)가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궁중에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한다는 풍설이 떠돌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광해군은 즉시 왕위에 올라 친형인 임해군 율(율)을 죽이고 우의정 유영경 등 소북파를 대량 학살했으며, 무고한 옥사를 일으키는 등 포악한 정치를 일삼았다.
고아해군 5년, 마침 서양갑 일당의 사건이 발각되자 이이첨이 그중 박응서를 꾀어,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모반하려 한다고 무고하게 했다. 이 모략에 의해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 그리고 그 소속 나인들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서궁으로 쫓겨나 폐비로서 젊은시절을 피눈물로 보내게 된다.
그 후 광해군이 국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기회를 엿보던 서인들이 봉기하여 인목대비의 영을 받들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仁祖)를 등극시킨다.
이러한 복잡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계축일기〉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인목대비가 서궁에 감금된 전후사의 기록인 이 애사(哀史)는 대비의 나인(內人)이 서인측 입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실화를 묘사하고 있는 만큼, 김제남 피살과 임해군 영창대군의 살해장면 그리고 광해군의 잔학함 등이 가끔 해학적으로 폭로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궁중의 암투, 시기, 질트 등 어지러운 풍속도가 역력히 그려져 있다.
한편 현대작가의 수법을 방불케하는 필치로 중후전아한 궁중어를 구사하고 한문이 아닌 순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어 문학적으로는 물론 우리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계축일기〉는 규장각 소장본을 대본으로 하였으며, 읽는이의 편리를 위해 철자법은 다소 현대식으로 고쳤음을 밝힌다.
- 주해자 전규태(前 전주대 교수, 국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