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스페란토판에 대하여
중국인으로서 나는 우리 조상이 남겨 놓은 중국의 이 풍부한 문화유산에 대해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중국문화 환경에서 자라나, 어린시절부터 언제나 우리 중국전통문화와, 진나라 시대부터 한나라 초기까지의 다양하고도 수많은 사상가나, 지도자들의 지혜, 특히 노자와 장자 사상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분들의 지혜는 우리 중국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며, 그 선현들의 저술들도 당연히 에스페란토 번역본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감히 내가, 상당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 귀중한 책 번역에 착수한 이유입니다. 에스페란토로 번역하면서 나에게는 수많은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그들 중 하나는 중국고전어와 에스페란토 사이의 문법구조 차이였습니다. 둘째가 두 문화 의 차이였습니다. 이름하여 중국문화와 서양문화(내 의견으로는 에스페란토 역시 서양문화어라는 점에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보인다)입니다. 세째가 원전의 고대성입니다. 이 저술은 2,000년도 훨씬 더된 옛날에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 저술은 골머리를 싸매게 하는 옛 낱말들, 의심스런 낱말들과 표현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네째의 또 다른 문제이자 가장 큰 문제는 원전의 난해함이었습니다. 아무 과장없이 말하건대, 모든 중국 고전작품 중 〈노자도덕경〉(La Libro de Laŭzi) 이 가장 어렵게 읽혔습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 이 저술은 아주 깊고 깊은 철학 문제를 다루고 있고, 다른 면에서, 아주 박식한 문체로 씌였기에 또 때로는 여러 함의를 갖고 있기에, 또 그렇게 이 책은 만일 그들이 상당히 권위있는 주석과 해설이 담긴 이 저술의 다양한 사전과 다양한 판본에 의지하지 않으면, 여전히 일반 독자들이나 비 전문 학식인에게조차도 신비로운 채로 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저술은 시나 산문의 형식으로 고급스타일로 씌였기에,이를 번역함에 있어, 그 원래의 내용을 온전히 보전하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문체를 유지함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만일 이 번역자가 형식과 내용에 똑같은 대단한 주의력을 갖춘다면, 그 내용 중 몇 가지 상세함은 어쩔 수 없이 잃을지도 모른다고 보았습니다. 〈노자 도덕경〉(La Libro de Laŭzi)은 미학 서적이라기보다는 정말 철학서적이기에: 그 위대한 가치는 주로 그 깊은 철학적 내용에 달려 있기에, 따라서 번역자 임무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원전의 사상을 제대로 전달함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다음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먼저, 원전의 내용을 가능한한 제대로 잘 살려, 에스페란토 문장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원전의 예술성을 가능한 보전하려고 했고, 만일 몇 군데서 그런 노력이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형식보다 그 내용에 충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둘째, 다른나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낱말에 따른 번역을 취했습니다; 몇 가지 경우, 만일 오해가 생길 수 있는 경우에는, 나는 자유로운 번역 입장을 취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같은 개념이나 표현이 다른 함의를 가진 다른 개념이나 표현으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무위senagado”, “아무 것도 하지 않음nenia agado”, “행동하지 않음ne agi” 또한 “아무 것도 하지 않음fari nenion” 이 중한글 표현 “无为”(wuwei)를 그렇게 옮겼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문장에 따른 번역이 제 뜻을 싣기에 부족한 경우에는 나는 설명을 이용했습니다. 셋째, 독자가 읽기 편하도록, 나는 매 장의 원문을 번역 한 뒤, 그 앞에다 요약과 잘 이해되지 않은 낱말에 대한 주서를 달아 두었고, 그 내용의 하단에는, 주석 뒤, 각 장에 역자인 내가 직접 쓴 해설(komento)을 덧붙였습니다.
〈노자 도덕경〉(La Libro de Laŭzi)은 다양한 원전이 있지만, 그 중 주요한 것은 허난성 장사(Changsha)에 있는 마옹추(马王堆)의 묘에서 발굴된 〈 La Sursilkaj Tekstoj de La Libro de Laŭzi eligitaj el la Han-dinastia Tombo〉, 동한 (东汉, 기원후 25-220)시대의 하상공(河上公)의 주석이 달린《老子章句》〈La Libro de Laŭzi〉 이고, 위나라 (기원후220-265) 때 왕필(王弼)의 주석을 붙인 〈도덕경주〉《道德经注》(〈Dao De Jing〉( Prinotita de Wang Bi de Wei-dinastio )입니다. 내 번역본은 주로 맨 나중의 책에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그 세째 본은, 둘째책을 참고하였기에, 다른 판본보다 더 믿을 만합니다.
이 번역본을 준비하면서, 나는 현대 중한글로 주석과 해설이 담긴 원전의 다양한 판본을 참고하고, 더 자세히 이해하려고, 또한 에스페란토로 더 잘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영어 번역본과 프랑스어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지식의 한계때문에, 불가피하게 적절하지 못한 표현과, 번역상 오류로 인해 독자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하지만, 만일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이 읽을만하다고 여긴다면, 이 가치는 나의 번역작업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가져다준 저 노자의 위대한 지혜 때문입니다.
역자 올림
한국의 경우는 여기에 역자가 간략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에 도가사상이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624년(영류왕 7)에 들어왔고, 신라와 백제에도 그 무렵을 전후하여 유입되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도가사상이 신도사상(神道思想) 내지는 선도사상(仙道思想)으로 대표되는 민족고유사상과 자연풍류사상의 바탕 위에서 도교와 분명한 구분 없이 혼합된 형태로 받아 들여 이해되어 왔다. 도교(道敎)와 『老子道德經(노자도덕경)』의 개요가 고구려에 전해진 것은 영류왕(榮留王) 때이다. 고구려는 이미 오두미교(五斗米敎)가 성행하였고, ‘도교적’ 문화전통이 있었다. 고구려에 전달된 도교는 노자의 무위정치 철학이었다. 정변을 일으킨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교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유교와 불교 세력을 견제하여 사상적 균형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때 들어온 『노자도덕경』은 왕필(王弼)의 주석본이었다.
20세기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되어 나온 신현중의 "국역 노자" 韋郞 愼弦重 著, "國譯 老子"(靑羽出版社, 1957)에서 최근의 번역본들에 이르기까지...다석 유영모, 김용옥, 김홍경의 번역, 이 세 가지 번역본이 20세기 한국에서 이루어진 "노자" 번역의 세 가지 조류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김갑수의 연구에 따르면, 김갑수, "한국 근대에서의 도가 및 제자철학의 이해와 번역", "시대와 철학" 제14권 2호(한국철학사상연구소, 2003 가을호); 김갑수, "1960년대 이후 도가 및 제자철학 원전 번역에 대한 연구", "제25회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발표회 자료집", 257~280쪽 참조. 20세기 한국에서 번역된 "노자"는 50년대에 2종, 60년대 2종, 70년대 14종, 80년대 21종, 90년대 31종, 2000~2003년까지 23종이나 된다. 50년대의 것으로는 신현중의 "국역 노자"(1957)와 유영모의 "늙은이"(1958)가 있는데, 이 가운데 신현중의 것은 최초의 완역 "노자"로서 인쇄되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지만, 유영모의 것은 등사본 형태로 특정 집단 내부에서 유통된 것이다. 이후 "노자"의 번역은 70년대에 갖가지 사상 전집류에 포함되어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수적으로 급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