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인도양 해양실크로드 I
- 고대적 시원
해양실크로드 문명의 전사(前史) 혹은 그 시원성을 찾아서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밸리 바닷길에서 출발한다. ‘청동기시대의 첫 세계화’란 관점에서 그리스 문명과 근동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와 소통하였던 인더스밸리 문명을 주목했다.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더스밸리 문명의 로탈 항구유산을 탐사하여 메소포타미아와의 소통을 분석했다. 이집트 문명도 바다를 통해 끊임없이 교섭하고 있었으며, 레반트의 페니키아 세력은 오랫동안 해상 무역상인으로 동방과 연결되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촉발한 근동으로의 그리스 문명 전파와 그리스인 및 후대 로마인의 인도양 해상활동은 다양한 기록이 증거로 남아있다.
2부. 인도양 해양실크로드 II
- 아라비아해와 페르시아만, 스와질리 해역권
인도양을 이슬람으로 물들인 아라비아 바닷길로부터 홍해의 고대 기독교왕국 악숨, 아라비아의 오래된 아덴항과 신라 석탑에서 발견된 대식국의 유향 같은 박래품, 신드바드의 나라 오만의 교역도시, 쿠웨이트와 바레인 등 페르시아만 고대항구를 서술했다. 아케메네스, 파르티아, 사산조에 이르도록 페르시아만에서 성쇠를 거듭한 페르시아 문명의 장기지속, 아바스 칼리프와 당나라의 발흥 확산이라는 세계 역사에서의 우연적 사건을 주목했다.
대항해시대 이후의 유럽 항해기술의 모태가 페르시아였다. 지금은 역사에서 퇴장한 천년의 항구 시라프와 호르무즈의 해양력을 서술하고, 변방 취급을 받아온 동부아프리카 인도양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인했다. 인도양 아라비아해라는 큰 차원에서 구자라트와 말라바르의 해양세계도 같이 다루었다. 파키스탄과 인도 서해안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페르시아만과 교섭한 요충지로서 로마 상인이 들어오던 곳이고, 인도양 전체에게 옷을 해입힌 면직물의 거점이었다. 말라바르는 향료, 특히 후추의 본산지로 유럽까지 방대한 양의 향료가 수출되었다. 몰디브의 앵무조개는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 말리왕국의 화폐로 쓰였다.
3부. 인도양 해양실크로드 III
- 코로만델과 벵골만 해역권
코로만델의 타밀나두는 힌두 문화의 본거지이지만 의외로 동방 기독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성 도마는 로마와 인도를 연결하던 국제 상선을 이용하여 코로만델에 당도했다. 동방의 구법자도 상선을 타고 이곳을 찾아왔다. 팔라바 왕국의 칸치푸람은 불교의 진원지였으며 달마나 의정 같은 구법승의 흔적이 확인된다. 해상강국 촐라는 글로벌 무역을 경영했으며, 스리랑카는 물론이고 인도네시아까지 자신들 영역에 넣었다. 촐라의 상인집단 길드는 여러 문헌으로 확인된다. 아리카메두까지 로마 상선이 당도했였으며, 반대로 인도 상인이 로마까지 들어갔다.
스리랑카 해협의 섬들은 아랍과 중국 상인이 교역하던 문명의 교차로였다. 벵골만은 중국 구법승이 뱃길로 당도하는 종착점이었으며 신라의 혜초도 그 길을 선택했다. 동인도 오딧샤는 힌두 문명이 동남아에 확산되는 거점이며, 동시에 불교가 바다를 건너 스리랑카로 들어가는 출발지였다. 벵골만의 방글라데시는 16세기 이후에 급격히 무슬림화되었으나 불교 왕국으로 존재해왔다. 미얀마는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남방실크로드 촉신독로의 거점이었으며, 오늘날 해양실크로드 유산이 대대적으로 발굴되는 중이다. 미얀마 남쪽 항구는 스리랑카와 교류하는 거점이기도 했으며, 스리랑카는 벵골만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었다. 로마인은 동서의 중간에 위치한 스리랑카를 ‘거대한 시장(Emporium)의 관문’으로 기록했다. 3장에서는 특히 해양실크로드를 떠돌던 상인 유랑민 유태인을 독립된 파트로 설명하고 있다.
4부. 동남아 해양실크로드
- 동남아 해역권
동서양의 역사서술에서 간과되었던 말레이반도의 강력한 해양력과 다양한 항시국가들을 주목했다. 1세기 중엽 프톨레마이오스가 ‘황금의 반도’라고 지도에 명명한 곳이며, 양나라 〈양직공도〉는 백제 사신이 말레이반도에서 온 사신을 중국에서 만났음을 실증한다. 말레이반도로 인도의 선진 문명이 당도했으며, 반대로 동쪽에서는 중국 상인이 당도하고 있었다. 동남아에서는 메콩강 하구의 푸난과 오늘날 앙코르와트의 진랍이 강국이었는데 이들 역시 바다를 건너온 인도 문명의 자장권에 있었다. 말레이반도에서 명멸한 많은 항시국가와 푸난 등이 대륙부에 속해 있었다면, 비로소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와 자바 같은 ‘섬 제국’이 출현했다. 스리위자야를 거쳐 자바의 샤일렌드라, 마자파힛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 해양사의 맥락이 육지에서 섬으로 이동해 이후에는 일관되게 ‘섬 제국’으로 흘러간다. 해양강국 스리위자야는 ‘바다의 노마드’들이 그 하부를 구성했으며, 삼불제란 호칭은 스리위자야 몰락 이후에도 장기지속으로 19세기 중국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해상무역에서는 수마트라 북단의 아체와 서쪽의 바루스가 주목된다. 마자피힛과 마타람 왕국의 탄생으로 인도네시아의 주도권은 수마트라에서 자바로 넘어가며, 자바 상인은 술라웨시, 말루쿠 제도의 향료를 아랍과 중국 상인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후 포르투갈을 위시한 유럽 세력이 직접 향료시장에 진입함으로써 전통적 향료의 바닷길이 붕괴된다. 말레이반도 끝자락에서는 해협의 길목을 차지한 믈라카 왕국이 번성했으며, 해상강국으로 그 경쟁자인 시암이 부상했다. 베트남에서는 짬파와 다이비엣족의 오랜 쟁투가 무려 19세기까지 진행되었으며, 호이안에 다양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5부. 남중국해 해양실크로드
- 남중국해 해역권
은상(殷商) 시대에 배는 이미 보편적 교통수단이었고, 주대(周代)에는 더 광범위한 수준에서 배를 만들었다. 고대 대항해의 진면목은 진시황이 남해무역을 촉진하면서 본격화한다. 선진(先秦) 시기의 동아시아 항해는 어디까지나 연근해 항로였다. 시황제에 의한 서불 원정은 선박 규모나 승선 인원 등 세계사에 유례가 없었다. 중국해양사에서 남쪽 해양민족 민월의 바다 역량은 대단했다. 중국사는 여전히 황하를 중심으로 한 내륙사관이 주류지만, 남은 배를, 북은 말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남선북마(南船北馬)의 역사적 경계가 선명했다. 한의 전략적 항구 합포와 번우가 남해에 자리잡았으며, 인근 교지(통킹만)까지 로마 사신이 들어왔다.
중국 해양실크로드사에서 역시 중요한 해역은 남중국해다. 당은 명실공히 육상과 해양실크로드가 동시 발전하던 화려한 시대였다. 진귀한 박래품과 낙타 대상의 온갖 물건이 장안으로 쇄도했다. 수중발굴 도자기로 볼 때 송대는 세라믹 로드(陶瓷之路)란 명칭도 가능하다. 송은 도자기, 차 제조. 면직염색 등에서 세계 수준을 자랑했다. 송대에는 〈제번지〉 같은 해양실크로드사의 세계적 저작물이 출간되었으며, 나침반의 보편화, 마조와 관음신앙의 바닷길 확산 등이 이루어진다.
원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팍스 몽골리카’ 세계질서를 만들어냈다. 원대에는 〈도이지략〉의 왕대연처럼 세계로 나아가기도 하고, 반면에 수많은 유럽 신부들이 원에 입성했다. 원대에 동서양이 본격적으로 지도에 등장한다. 팬데믹에 의해 원의 바닷길이 한동안 멈춘 시절도 있었다. 오늘의 중국은 해양굴기(海洋屈起)를 중국몽으로 내세우며 명의 정화함대를 모범으로 선전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화 이후에 바다에서 철수한 아픈 역사가 있다. 왜구의 동아시아 노략질과 해금정책, 민간 상인의 본격적 해외 무역과 남양화교의 진출 등이 명대에 이루어졌다.
6부. 동북아 해양실크로드
- 동북아 해역권
일본의 육지와의 첫 교섭은 당연히 한반도였다. 일본과 중국의 공식 교섭 활성화는 수ㆍ당 시기다. 송원에 이르러 아시아 바닷길이 무한 번성하면서 일본열도의 교섭 통상도 빈번해졌다. 명은 해금령을 내려 왜구 피해를 줄이고자 했다. 왜구에 진저리를 치던 명은 교역을 허락해 왜구를 외교 관계의 공적 통제권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로써 견당사 폐지 이래 근 500여 년 만에 일본과 명 사이에 이른바 감합(勘合)무역이 시작됐다. 일본은 고려와도 활발히 교역했다. 일본의 남방 정책에서 중요한 나라는 류큐였다. 류큐는 동중국해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본과 조선을 잇는 환중국해 중개 교역의 거점으로 번영했다. 환동해 연결 루트도 주목되는데 이는 실크로드의 북회경로(北回經路)다. 육상실크로드를 통해 연해주까지 당도했다. 여진과 숙신, 고구려와 발해가 이 북방 바닷길에 매개되어 있으며, 이 북방노선은 오호츠크해까지 이어졌다.
한반도 고대 해양실크로드 서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늘 자료의 제한성이다. 가설과 가정, 유추가 가능하지만 입증이 쉽지 않다. 한반도 고대는 동아시아 권역의 바닷길을 개척하는 단계였다. 사회경제적 발전 단계가 더 먼 바닷길을 요구하지 않았고, 권역 내에서 문물을 받아들이고 소통하는 단계였다. 한반도가 유라시아 육상실크로드 동단(東端)임은 분명하다. 한반도는 육로로 실크로드가 닿는 종착점이었다. 고구려는 환황해 루트를 개발하고 있었다. 6세기 양의 〈양직공도〉에 백제만 흔적을 남긴 것이 아니다. 고구려도 그 흔적을 남겼다. 남조와 고구려가 해양실크로드의 고대적 뱃길로 연결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관점에서 한반도 해양력의 정점은 가야다. 문제는 자료가 제한적이고 일찍이 잊힌 바닷길이 됐다는 데 있다. 해양사에서는 백제도 중요하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중국 및 일본과 연결하는 해양실크로드의 주역은 백제였다. 삼국시대에 백제의 불교 남래설, 즉 바닷길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신라 견당사와 장보고 해상무역은 신라선의 뛰어난 조선술에 기인한다. 고려 초부터 고려 해상은 중국과 무역을 행했다. 선화봉사 서긍의 〈고려도경〉은 양국 바닷길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원대에도 송상에 의한 교역은 지속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제한적이나 조선과 유구, 동남아의 교섭도 진행되었다. 해금정책을 구사한 조선의 문제점은 항시적 무역로 개설, 항구, 선박 조선업, 항해기술 등을 적극 추동하지 못한 데 있다. 그 후과는 19세기 말 해양 세력에게 식민지로 접수되는 비극을 겪게 된다.
보론: 유럽 이전의 바닷길과 세계체제
유사무서의 바다 역사와 노마드, 명칭·거리·항로·항구·도시·조선술·경제권역·십자로, 욕망과 충족의 박래품 세계, 손님의 ‘피부색’을 보지 않고 ‘동전색’을 보는 상인의 디아스포라, 바다를 건넌 개척자와 기록의 힘, 세계관의 전환과 세계체제의 재구성, 서방 오리엔탈리즘과 동방 중화주의, 일국사를 넘어서 등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쟁점들을 정리했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의 주역이던 아시아 바닷길은 거의 대부분 유럽의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로 접수됐다. 따라서 이 바닷길의 역사 역시 유럽 중심으로 서술되고 고정화되기에 이른다. ‘유럽 중심주의’는 서구 문명이 독특한 역사적 우월성, 인종·문화·환경·심성·정신적 특질을 갖는다고 본다. 그로 인해 유럽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비유럽에 대해 항구적 우월성을 갖게 됐다. 유럽은 역사의 창조자로서 늘 자생적으로 진보하고 근대화하는 반면, 나머지 세계는 늘 정체되어 있다.
주목할 점은 해양실크로드 역사 서술에서 유럽인의 왜곡은 생각 이상으로 치밀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해양실크로드의 중간 고리인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인도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을 유럽 국가가 식민화하면서 기존 역사 서술은 서양의 관점에서 기술됐다.
중국에서 근래에 편찬되는 해양실크로드사는 중국몽(中國夢)이라는 목표 아래 정화의 대원정을 강조하고 중국과 로마의 직방 교섭을 부각한다. 정화 대원정이 세계적 사건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이런 서술은 명 이전에 원의 세계체제가 선행됐음을 축소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로마에 이르는 여정에 존재하던 동남아시아 제국, 인도아대륙,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동아프리카, 홍해와 레반트 등의 역할은 간과되거나 제한적으로 서술된다. 중국 중심의 실크로드사는 그 노정에 놓여 있던 많은 나라를 대상화하며, 주체적 존재가 아닌 것으로 무시된다. 조공을 바치던 나라라는 기미체제(羈縻體制)의 새삼스러운 강조는 중국 중심의 만이적(蠻夷的) 세계관·해양관이 아직도 진행됨을 뜻한다.
오호츠크해에 도달하는 유라시아 전체사로서의 변방 한국과 일본이 갖는 특수성, 그럼에도 자기 세력을 온존하면서 바다로 나아갔던 극동의 힘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국과는 또 다른 힘이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해양실크로드의 동단은 한국과 일본이며, 그 서단은 아프리카 동부의 스와힐리 해안이다. 서단에서 동단까지, 동단에서 서단까지,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의 궤적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