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재일코리안 출신 스포츠인의 감동적이지만 망각된 활약상을 한국 근현대사 속에 위치시킨다. 그들은 옛 식민지 종주국에서 차별받았을 뿐만 아니라, 모국에서도 ‘반쪽발이’로 조롱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강인함과 모국을 향한 애정으로 한국 스포츠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선수뿐만 아니라 재일 사회의 지원도 꾸준히 이어졌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보름 전에 개막한 1948년 런던올림픽. 첫 태극마크를 단 선수단은 후쿠오카와 요코하마를 경유해 장도에 올랐다. 일찌감치 환영준비위원회를 꾸린 재일교포들은 선수단이 주요 역에 도착할 때마다 김치와 선물을 안기며 맞이했고 64만 엔이 넘는 거액의 찬조금과 운동 기구를 전달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상황에서 출전한 1952년 헬싱키올림픽 때도 재일코리안 사회는 유니폼과 보스턴백, 운동 기구 등 출전에 필요한 장비 일체를 기부했다. 이러한 지원은 서울올림픽까지 이어져 100억 엔의 대대적인 기부가 이어지기도 했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격랑 속에 몸을 던진 재일 스포츠 영웅들의 파란만장 스토리
장면 #1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기 1년 전인 1964년 겨울, 스물을 갓 넘긴 야구 유망주 김성근은 일본의 재류 자격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향했다. 당시로서는 언제 실현될지 모르는 국교정상화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야구가 하고 싶었어요.”
어머니는 맹렬히 반대했고 여권을 숨기기도 했다. 어머니가 아들의 영주 귀국을 반대한 까닭은 고국에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혹독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구나. 네가 택한 인생이니 네가 책임져야 한다. 혹시 잘못되더라도 원망하지 말거라.” 아들의 각오를 바라는 어머니의 말을 김성근도 단단히 새겨 두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삶의 근본이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누구 탓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어요.”
장면 #2
남북이 자존심을 걸고 대립했던 시기, 1972년 뮌헨올림픽에 첫 출전한 북한은 금메달 한개, 은메달 한 개, 동메달 세 개로 종합 22위를 달성하며, 은메달 한 개가 유일했던 남한을 압도한다. 한국의 유일한 메달리스트는 재일코리안 출신인 유도의 오승립이었다. 하지만 노메달의 공포에서 구한 그에게 비난이 날아든다. 결승전에서 패배한 상대가 바로 일본의 세키네 시노부였기 때문이다. “너, 마지막엔 일부러 쓰러져 준 거지?” “일본에 살고 있으니까 일본에 져 준거냐?”참다못한 오승립은 생각한 바를 한국어로 잘 전달하기 어려워서, “실례지만 일본어로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자신의 마음을 쏟아낸다. “시합을 하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신다면 그런 말이 나옵니까?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나라를 위해서도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지고 싶어서 지는 인간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한국에 오면 ‘반쪽발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 재미 좋았냐는 말까지 듣습니다. 일본에서는 외국인이라 부릅니다.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들 마음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면 #3
1944년 4월 22일, 일본 프로야구 사상 제1호 데뷔 첫 타석 홈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가네미쓰 아키오의 본명은 김영조. 홈런을 허용한 비운의 투수 후지모토 히데오는 절치부심하여 1950년, 일본 프로야구 첫 퍼펙트게임을 달성한다. 후지모토의 본명은 이팔용.
30여 년이 흘러, 1981년 8월 21일, 일본 전국고교야구 선수권 대회가 펼쳐진 고시엔 야구장 전광판에는 정(鄭)과 한(韓)이라는 낯선 ‘조선인’의 이름이 켜진다. 하지만 그날 그들이 속한 팀을 정확히 100개의 공으로 압도하며 완봉승을 거둔 투수는 가네무라 요시아키. 그 역시 김의명이라는 민족명을 가진 재일코리안이었다. 가네무라는 이후 한국의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에도 참가했고, 그의 일본 프로야구 진출 상황은 당시 한국 언론에서도 단골 기사로 오르기도 했다.
일본 여자 최강 실업팀의 득점왕이었던 이와모토 에이코는 한국 농구사에는 국가대표 농구팀 주장 조영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마라톤 및 하코네 역전 경주의 스타였던 김철언은 잘 알려져 있던 기노시타 데쓰히코라는 이름을 과감히 버리며 활동을 이어갔다. 그 밖에도 장명부 혹은 후쿠시 히로아키, 추성훈 혹은 아키야마 요시히로처럼 ‘혹은’으로 연결되는 그 이름들은 한일 사회에서 경계인으로서 불리함을 마다치 않고 모국의 부름에 응답했고, 때로는 한일 교류의 첨병으로 공헌해 왔다. 외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활동의 장을 빼앗기고 양국의 틈새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면서도 계속 싸워 온 재일코리안 체육인들의 역사는 이제 망각의 봉인을 열어젖히고 기억되고 기록되려고 한다.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다시 보는 재일코리안 스포츠 영웅과 스포츠 교류사
저자는 야구, 축구, 유도, 레슬링, 배구·농구, 골프, 마라톤, 동계스포츠 등 종목별로 서술하지만, 시간적으로는 식민지 시대의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시작된 한일 스포츠 교류사를 숙명의 라이벌 시기를 거쳐 한일 공동월드컵이 개최된 2000년대 이후까지 종횡무진 넘나든다.
식민지 시기: 식민지 시기 한일 스포츠사에 드리워진 명암의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쿠베르탱’으로 불리는 사회학자 이상백이 일본농구협회의 산파 역할을 하며 ‘일본 농구의 아버지’로도 알려진 사실이 빛이라면, 그리고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고 일본 유학을 떠났어도 육상 경기를 금지당한 아픈 사연은 그림자에 해당할 것이다.
1950년대: 국교 단절과 반일정서 속에서도 재일코리안의 활동과 기술 전수는 꿋꿋하게 이어졌다. 지고 돌아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라던 이승만 정부의 압박 속에서 어렵게 성사된 1954년의 축구 한일전, 1956년 창설된 재일교표학생야구단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민단과 총련으로 격렬하게 대립하던 재일 사회에서도 이념을 넘어선 재일 전(全)코리아 축구팀이 결성되는 감동스런 일화도 기억해 둘만하다.
1960년대: 재일 사회는 북한으로의 귀환 운동, 한일국교정상화 등 긴장의 시대를 맞이하여 각 개인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국적의 벽에 가로막혀 국가대표로는 물론, 사회인 스포츠팀이나 프로선수의 길도 여의치 않았던 일본 사회 속 편견과 차별은 말할 것도 없었다.
1970년대: 북한이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출전하면서, 이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이 전력 강화와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하려 할 때, 국가대표팀에 소속되어 조국을 빛냈던 선수들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 안의 외국인’이던 재일코리안에 대해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병역 면제나 진학 특혜 등의 제도적 틀 바깥에 있는 재일코리안을 향한 시선도 차가웠다. 1970-1980년대 고교야구의 황금기에 그라운드를 뜨겁게 달구었던 ‘재일동포’ 야구팀도 마찬가지다. 토너먼트 초기에는 열렬하던 응원이 8강, 4강, 우승에 가까워질수록 분위기가 급변해 흡사 원정경기 같은 상황 속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일의 스포츠 강국의 지위가 역전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월드컵 공동 개최로 전환기를 맞은 2000년대까지 이야기는 이어진다. 가깝고도 먼 두 나라의 스포츠 문화 교류 속에서 재일코리안은 어떻게 활동의 장을 펼쳐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