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번역과 상세한 해설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은 각 작품의 분량이 대하소설에 육박할 정도로 장대하다. 이 대작들의 번역 역시 치열한 작업이다. 한 사람이 4대 장편을 다 번역한 사례가 세계적으로 드물고, 한국에서는 유일무이하다. 4대 장편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 서로 잇닿아 있다. 고유한 문체 역시 각기 다른 사람의 작업으로는 일관된 결을 살리기 어렵다. 한 사람의 번역이 필요한 이유다. 국내 최초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번역 도전에 작가를 향한 애정과 열의로 뭉친 김정아 역자가 도전한다. 백 년 갈 번역으로 도스토옙스키를 국내에 소개하고, 그에 걸맞은 옷을 입히고자 출판사와 역자가 의기투합했다. 2021년 1월 ≪죄와 벌≫, 2022년 4월 ≪백치≫에 이어 세 번째 책 ≪악령≫을 선보인다.
김정아의 번역은 정확하고 “힙”하다. 즉, 지극히 현대적이어서 요즘 말로 설명하듯 쉽고, 역자의 발랄함이 더해져 유연하고 따뜻하고 친절하다. 덕분에 대작이 가진 위엄과 육중함에 짓눌리지 않게 한다. 고교 3학년 때 ≪죄와 벌≫에 매료된 이후 ≪죄와 벌≫로 박사논문을 쓰고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번역하면서 30년 넘게 그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살아왔다.
책에는 상세한 해설과 이미지 자료가 수록되었다. 원고지 200매에 달하는 해설에서 작품의 시대적 자전적 배경, 여러 주제와 담론, 인물이 나타내는 상징 등 작품에 대한 심도 깊은 해석을 접할 수 있다. 또 작품에 등장하는 소품과 명화의 이미지 자료로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삽화로 보는 이야기
책에는 총 40개의 삽화가 수록되었다. 삽화들은 작품 속 인물들이 전개하는 커다란 사건을 중심으로 제작되어 텍스트로 느끼는 것에 버금가는 시각적 감명을 안겨 준다. 러시아 비타노바 출판사(Вита Нова)에서 출간된 ≪БЕСЫ≫에 수록된 것으로 미하일 가브리치코프(Михаил А. Гавричков)가 그린 작품들이다. 가브리치코프는 1963년 레닌그라드(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회화·조각·건축학교를 졸업했다. 화가, 그래픽 아티스트, 조각가 등으로 활동하며 러시아를 포함 전 세계 전시회에 120회 이상 참여했고 개인전을 18차례 열었다. 작품은 예르미타시, 러시아국립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거대 사상들의 각축장
≪악령≫은 작가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과 더불어 정치적 사상가이자 묵시록적 예언가로서 도스토옙스키의 면모가 상당히 부각되는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을 사상의 담지자(ideolog)라고 칭한 바흐친의 이론을 이만큼이나 잘 증명하는 작품도 드물 만큼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은 각자 하나의 거대 이데올로기를 대표한다. 다시 말해 ≪악령≫은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괴롭힌 거대 사상들의 각축장이다. 도스토옙스키 이후 러시아 사상가들 중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 비평가 베르댜예프의 말은 과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그의 사상의 영향에 대한 과소평가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은 후대 러시아 사상가뿐만 아니라 저 유명한 니체의 초인 사상과 영원 회귀 사상으로부터 21세기의 히친스에까지 이르며, 아마도 몇백 년 후라 하더라도 시공을 초월해 그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가 답을 찾으려 고뇌하며 던지는 질문은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물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갖게 되는 근본적인 질문들이기에 그러하다.
근본적이지만 심오한 철학적 질문들과 신과 인간의 문제에 더불어 ≪악령≫에는 예수 재림이 러시아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러시아 정교가 기독교의 중심이요, 러시아가 로마, 비잔틴을 잇는 제3의 로마가 되리라는 러시아 제3로마 이론, 어머니 대지 신앙, 또 참칭자 드미트리란 역사적 인물과 이반 차레비치(царе́вич : 왕자)의 신화, 러시아 정교의 특징 중 하나인 유로디비(юродивый) 전통, 더 나아가 러시아의 정체성을 다루는 동과 서의 문제 등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