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난 직후 동북지방 지역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한 결핵소년의 연애담 〈판도라의 상자〉를 읽다 보면, 누군가 옆에서 가칠가칠한 솔로 피부를 문지르고 있을 것만 같은, 미세하고도 선명한 감각이 느껴진다. 다자이는 작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그러한 감각의 소통이, 사람의 정신을 일깨우고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라 믿었다.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정이나 질투, 다툼이나 부끄러움, 혹은 그것들의 뒤섞임. 〈판도라의 상자〉 속에는 사람들의 그런 솔직한 감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잔물결처럼 흔들린다. 사소한 개인의 감정은 억제하고 커다란 이념과 사상 아래 단결해야 하는 시대, 이에 동참하지 않거나 변두리에서 맴도는 이들은 불량아들이거나 쓸모없는 놈팡이 취급을 받던 시대, 그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막이 올랐음을, 다자이는 이 작품을 통해 보란 듯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상이나 이념보다는 한 송이 꽃의 미소가 더 소중한 이들도 있으며, 그것이 살아가는 의미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옮긴이 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