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 무엇을 다시 번성시킬 것인가?
‘물질도 행동한다’는 인식의 전환으로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새로운 현대 사상으로 대두되어 여러 학문 분야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신유물론. 『신유물론, 물질의 존재론과 정치학』은 21세기 첨단의 철학인 신유물론에 대한 포괄적인 입문서이자 연구서다. 이 책은 신유물론이 다루는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신유물론자들의 이론적 성과를 종합할 뿐만 아니라, 주요 철학자들의 이론을 요약하고 이로 인한 논쟁점들을 설명한다. 즉 신유물론의 내용을 종합하면서 이론적·실천적·역사적 지도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푸코, 데리다, 들뢰즈 이후 서양철학의 방향은 신유물론으로 수렴된다. 저 세 거장들은 모두 권력, 역사, 담론과 텍스트에서 괄목할 만한 사유의 혁신을 단행했으며, 그것은 모두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 그리고 이성애중심주의를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했다. 이른바 ‘해체’란 이 파괴된 폐허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유물론은 이 광활한 폐허 위에 지금껏 본 적 없는 기묘한 이론의 혼종복합체를 탄생시킨다. 이 복합체는 인간-기계-동물-미생물-무생물의 아나키즘을 실현한다. 거대담론의 스카이라인이 사라진 대지에 번성하는 것은 오로지 이러한 아나키한 평등성, 또는 존재의 무한한 변신과 변종들이다.
신유물론이라는 드라마의
다채로운 시나리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적이지도 않고 항상 생성하고 흐르고 또한 변화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신유물론 역시 끊임없이 진행 중인 이론이다. 또한 신유물론은 과거의 이론은 물론이고 당대의 이론들과도 논쟁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이렇게 막 전개되기 시작한 신유물론이라는 드라마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보류되거나 숨어 있던 질문들과 그에 대한 신유물론의 탐색이 그러한 경험을 이끈다. ‘물질이란 어떤 것인가?’ ‘주체는 실제적인가?’ ‘실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새로운 주체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등등. 우리는 이 질문들을 책 곳곳에서 발견할 것이며 이론적 드라마의 매 회차마다 이론과 그것의 존재론적이고 정치적인 면모들을 알 수 있게 된다.
책의 1부 ‘신유물론의 철학’에서 우리는 결코 완결되지 않는 철학으로서의 신유물론의 배경과 의미, 물질의 능동성, 횡단성, 수행성 등 주요 주제들을 살핀다. 그리고 2부 ‘신유물론의 이론가들’에서는 신유물론의 개시한 이들이라 할 수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 로지 브라이도티, 마누엘 데란다 등에서부터 퀑탱 메이야수, 카렌 바라드 그리고 새로운 세대인 토머스 네일에 이르는 다양한 철학자들의 계보를 따라가게 된다. 또한 저자는 두 개의 보론을 통해 기술철학자 육후이(Yuk Hui)를 신유물론 그룹에 넣으려 시도하기도 한다.
무수한 ‘교차’로 자신만의 길을 내는 신유물론
경계를 날카롭게 횡단하는 개념들, 이분법의 성채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문장들, 거기에 물질의 흐름이 새롭게 탄생한다. 이 책은 그 길의 여러 교차로를 ‘능동성’, ‘횡단성’, ‘관계성’, ‘우발성’, ‘사건성’, ‘수행성’이라 이름 붙인다. 그리고 그 길잡이 유령들의 이름들을 각각 호명한다. 그들은 모두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며 또한 문화이론가이자 페미니스트들이다.
그들은 우선 자연-문화 이분법을 새로운 자연주의 안으로 이식하고, 그 가운데 무수한 사이보그들을 탄생시킨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남성-여성 이분법을 내던지고 그 자리에 LGBTQ+를 채워 넣는다. 섹스-젠더 이분법을 걷어내고 거기 사회적 신체, 정치적 신체, 철학적 신체 등등을 불러 세운다. 이러한 새로운 자연주의의 신체들은 결코 고립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네트워킹한다. 그리고 교차한다. 그러나 네트워크와 교차는 수월하지 않다. 거기에는 단순한 조화와 연합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수한 불일치, 교전, 어긋남, 전쟁상태, 불화, 이 모든 길항의 계기들이 행위자들을 강화시키거나 소멸시킨다.
유물론은 반드시 실천철학이어야 한다
현대유물론은 현재 제기되고 있는 지구 행성의 오염과 그 회복 가능성, 인간이 그간 누려 온 보편적 특권에 대한 성찰, 더 나아가 행위주체와 과학적 인과성 자체에 대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실천적으로 이것은 당대를 ‘인류세’(anthropocene) 또는 ‘자본세’(capitalocene)로 규정하고 이를 ‘살게 하는’ 방향으로 이끌 윤리-정치적 모색을 한다. 우리는 이 문제 제기와 실천적 탐색 모두를 ‘신유물론’이라고 부를 것이다.
따라서 신유물론의 출현은 “하나의 방법, 개념적 틀, 정치적 입장”이라는 총체적인 요청에 힘입은 것이다. 이 요청은 그간 인문사회과학의 헤게모니를 구축하던 언어학적 패러다임 대신에 권력과 신체, 물질적인 것의 잠재성(virtuality)과 현행성(actuality), 도래하는 민중(유목적 주체-사이보그)에 대해 사유하도록 만든다. _본문 31~32쪽 중에서
신유물론의 극복 대상은 ‘인간중심주의에서의 물질’이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물질은 자연스레 수동성을 가진 것으로 정의되고, 이는 인간이 물질을 지배할 수 있다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물질은 항상 생성 중이고 운동 중이며 따라서 구유물론이든 신유물론이든 결코 인간적인 것, 물질, 실체화된 것을 중심에 놓고 그것으로 환원하는 이론이 아니다. “(신)유물론은 물질 안에서 생명을 사유하며 실체적인 본질이 아니라, 생성의 본질(작동 방식)에 집중”한다. 그러므로 유물론은 필연적으로 “당대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급진적 성찰과 비판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시대이자 인간과 비인간이 상호작용하는 지금, 이 책은 물질에 대한 사유를 통해 현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우리에게 길을 제시한다. 바야흐로 인간을 넘어 그 이상의 세계를 이해하는 눈을 가져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