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철창에 갇혀 있는 것인가, 그대가 철창에 갇혀 있는 것인가.”
자유를 빼앗긴 존재들의 닮은꼴 운명!
《왕과 사자》는 사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자의 시선은 심드렁하다. 철창 안에 갇혀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시공간에 틈을 만들고, 우리를 일제 강점기 창경원으로 이끈다.
사자는 철창 안에서 애쓰지 않아도, 동물원과 세상의 사정에 훤하다. 동물원 동물들의 사정도 각각이다. 원숭이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받는 걸 즐긴다. 꽤 요란하게 재롱도 부릴 줄 안다. 안전하고 밥 굶지 않는 동물원이라는 공간이 마음에 들기까지 하다. 하지만 시베리아호랑이에게 동물원은 하루에도 수십 번 벽에 머리를 부딪칠 만큼 미쳐 버릴 것 같은 공간이다.
사자가 바라보는 사람들의 풍경도 가지가지다. 창경원 관리소장인 일본인 이토 상은 입만 열면 조선과 조선인들을 개돼지 취급하며 깔보고 욕하기 일쑤다. 그의 서슴없는 생각, 서슴없는 말은 같은 일본인이지만 사육사 나카다 상조차 불편할 때가 많다. 그런 가운데 이토 상에게 험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인 사육사 김 씨. 그는 이 창경원에서 동물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동물들의 환심을 산 유일한 사람이다.
【만만한책방】왕과 사자 ②
김씨는 누군가를 늘 걱정한다. 목요일의 산책자, 동물원이 쉬는 목요일에만 찾아오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다.
사자와 순종은 서로를 마주 본다. 사자의 갈기처럼 황제는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있다. 철창 속에서 갈기가 빛나지 않듯, 나라 잃은 임금에게 곤룡포는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둘 다 자유를 잃고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사자의 눈으로 순종 임금을 만난다. 나라를 잃고, 궁궐을 빼앗기고, 어르고 달래는 말들 속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 두 존재는 한눈에 알아본다. 서로가 같은 처지의 삶이라는 것을.
▌이름마저 빼앗긴 암흑의 시대! 그들이 살아 낸 창경원의 시간!
어머니 명성 황후를 잃은 순종을 위로하고, 조선 백성의 유희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일제에 의해 창경궁은 헐리고 파괴되어 식물원이 되고 동물원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진짜 목적은 황실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백성들의 기를 꺾어 놓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창경원.
황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자신의 이름을 빼앗겼다. 일본식 이름을 짓지 않으면 교육도 직업도 가질 수 없었던 암흑의 시대. 목요일의 산책자를 걱정하는 사육사 김 씨도 일제에 의해 부모님이 지어 준 복돌이라는 이름을 빼앗기고 카나타 상으로 불린다. 한글 가나다를 일본식 이름으로 바꾼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이 보살피던 동물들에게 한글 이름을 지어 준다.
“누리” 초원을 누비듯, 누리라는 의미에서 사육사 김 씨가 사자에게 붙여 준 이름이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초원을 누비던 기억이 소환되고, 사자는 내면 어딘가에서 자유에 대한 소망으로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김 씨는 동물원에서 태어난 원숭이 새끼에게는 ‘대한’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이름은 단지 이름에 그치지 않는다. 대한의 정신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정체성을 잊지 않는 한, 대한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뜻한다.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면서 창경원에서의 굴욕적인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났을까. 죽기 전 마지막 용기를 낸 순종은 한일병합은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선언하고, 삼일절에도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나서지 못한 사육사 김 씨는 순종의 죽음 뒤에 일본 순사들이 쫙 깔린 창경원에서 만세를 부른다. 세상만사 심드렁했던 사자는 김 씨가 잡혀가던 날, 미친 듯이 창살을 긁어 대고, 만세를 곱씹는다.
‘도대체 만세가 무엇이길래.’
▌“누리야. 다음 생에는 꼭 세상을 누려.”
자유를 향해 외치는 사자의 슬픈 만세!
초원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원숭이는 밖에 나가면 굶어 죽을 거라고 한다. 자유가 없지만, 배곯지 않는 이곳이 더 좋다고 한다. 사람들은 3.1운동 이후에도 6.10만세운동 이후에도 변화된 것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살기가 더 퍽퍽해졌다고 했다. 그러니 독립운동은 꿈도 꾸지 말고 그냥 살라고들 했다.
【만만한책방】왕과 사자 ③
만세를 불렀던 김 씨가 사라지고 나서도, 사자는 자신을 가둔 창살을 긁어 대는 걸 멈추지 않았다. 김 씨와 같은 사람들이 만세의 외침을 멈추지 않았기에 조선은 독립할 수 있었고, 너무나 견고해서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던 동물원 창살도 온 힘을 다해 부딪치면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다. 멈추지 않았기에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자는 김 씨가 불렀던 만세를, 자신도 부르기로 결심한다. 과연 우리는 사자의 포효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사자가 내딛는 자유를 향한 발걸음마저도 지지받아야 하는 것임을 이 책은 말한다.
▌ 역사의 시간을 거닐며 자유와 공존에 대해 질문하는 역사팩션 《왕과 사자》!
창경궁은 해방이 되고도 한참이 지난 1983년에서야 비로소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때 동물들은 해방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불행히도 동물원의 동물들은 자유를 찾지 못했다. 해방 20일 전, 맹수들이 창경원을 탈출하면 사람들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일제의 판단에 따라 독살되거나 굶어 죽었다.
김주현 작가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왕과 사자》는 명성 황후 시해 사건, 고종 황제 독살 사건, 한일강제병합, 3.1운동, 6.10만세운동 등 역사적 사건들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 만들어진동물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복원하면서 ‘냉소적인 사자’라는 새로운 내레이터의 눈을 통해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아픔을 흥미롭게 창조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만들어 낸 동물원이라는 폐쇄된 공간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의식과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들도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책의 말미에 모든 생명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사자의 편지는 용기와 자유, 우정을 생각하게 하는 등 독자에게 묵직한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