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혁명에서 찾은 혁신의 4법칙
“과거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라”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진화하라”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가져라”
“충성심 대신 용기를 품어라”
천적이 없던 13세기 몽골군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한 이집트 맘루크 술탄국은 1516년 마지 다비크 전투에서 오스만제국에 패하고 역사에서 이름을 잃었다. 화약 무기를 가진 오스만 앞에 맘루크의 자긍심 넘치는 무예는 속수무책으로 파괴당했다. 권력이 개인이 아닌 집단에게 있던 맘루크와 달리, 권력이 세습되던 오스만은 집단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웠고 새로운 기술을 적극 받아들였다. 엘리트 노예라는 ‘정체성’을 손에 쥔 자와 화약 무기를 손에 쥔 자의 대결에서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한편 종교 갈등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의 시기, 화약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유럽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었다. 가톨릭의 황제군과 신교의 스웨덴군은 브라이덴펠트와 뤼첸에서의 대규모 전투를 통해 서로의 기술을 적극 받아들였다. 스페인의 ‘테르시오(Tercio)’ 군사 편제를 바탕으로 한 창병 중심의 황제군은 교차사격이 가능하도록 구성된 총병 중심의 스웨덴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러나 불과 1년 후, 적군의 기술을 받아들인 황제군의 포탄은 스웨덴군의 리더 구스타프 아돌프에게 박혔다. 미국의 진화 생물학자 리 밴 베일런이 제기한 ‘붉은 여왕 효과’에서 진화를 멈추는 것은 멸종을 의미한다. 근대 유럽은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붉은 여왕의 나라였다. ‘진화’하지 않는 것은 곧 정지가 아닌 후퇴를 의미했다.
반면 15세기에만 해도 서양에 대해 완전한 우위를 점했던 동양은 시간이 흐를수록 화약 무기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상화되어 있던 센고쿠시대, 다네가시마에 등장한 위력적인 신무기는 일본열도 전체에 급속도로 퍼졌다.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경쟁 앞에 사무라이의 자존심이나 품위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란의 동시대를 살던 조선과 후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동양은 직접 화약 무기를 생산할 만큼의 기술을 갖추었고 16세기 말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화승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17세기를 기준으로 동아시아와 유럽의 화약 무기는 동등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가 종지부를 찍으며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 동양은 곧 ‘위기의식’을 잃고 만다.
이후 1840년 아편전쟁과 함께 동양은 외부로부터 벼락같은 근대를 맞이한다. 이때만 해도 청나라와 일본이 서양 세력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충성심’으로 무장한 채 더 이상의 진보를 거부한 청나라의 양무파와 달리, 처음부터 기존 권력에 대항할 반역자로 구성된 일본의 유신파는 혁신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 기존의 권력이 아닌 새로운 권력이 혁신의 가속 페달을 밟은 순간, 일본은 거침없는 근대화를 이뤄냈다. 그런 점에서 1895년 시모노세키에서 마주 앉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암은 혁신이 시작되던 30년 전에 이미 결정됐다고 할 만하다.
생존경쟁의 화약혁명의 역사
우아한 승자는 없다!
국가의 운명을 뒤바꾸는 혁신의 맨얼굴
대규모의 미사일이 난무하는 현대의 전쟁과 달리 과거 전쟁에서는 무사의 품위나 기예를 중시했다. 그들이 오랜 시간 갈고 닦은 전투기술은 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을 더하는 권력의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역사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는 순간, 이전의 권력은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모든 역사는 기득권 세력과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새로운 권력의 교체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터는 그 운명의 교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다. 특히 전쟁터를 중세 기사들의 낭만적 공간에서 철저한 무력의 장으로 탈바꿈시킨 ‘화약혁명’은 이후의 역사를 아주 새롭게 써 내려간 분기점이 됐다. 화약 무기라는 혁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역사의 다음 장에 더 이상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경쟁은 혁신의 원동력으로써 권력자들에게 혁신을 강제했다.
누군가는 혁신이 강제되기 전, 더욱 철저하게 혁신을 계획하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상식적으로도 좋은 아이디어가 혁신을 이룰 것 같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혁신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득권을 해체하려는 용기와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권력이다. 그리고 그 권력이 주어졌을 때 과감하게 가속 페달을 밟는 자가 바로 다음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그 순간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자가 혁신가인지, 아니면 혁신으로 도태당할 자인지에 따라 한 국가와 민족의 미래는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