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 56년 강인한 시인, 오늘의 시를 말한다
시화는 시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이다
시화(詩話)는 우리나라에서 고려 말 이인로에 이어 조선 초 서거정의 『동인시화(東人詩話)』 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시화에는 첫째 시의 본질을 논의하는 시론(詩論), 둘째 시의 작법을 제시하는 작시론(作詩論), 셋째 시 작품이나 시인을 해설⸳평가하는 시평(詩評), 넷째 역대 시인들의 행적이나 시작 배경의 숨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시 일화(逸話) 등이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시 시론, 시 해설이나 비평 따위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장르가 곧 시화(詩話)다.
백록시화는 백록 강인한 시인이 쓴 시화다.
인터넷 카페 〈푸른 시의 방〉 카페지기 강인한
2002년 3월부터 시인은 자기만의 인터넷 카페 〈푸른 시의 방〉운영을 시작했다. 시인은 말한다. 그는 시인이며 동시에 시 독자라고. 김종해 시인은 스스로를 시 전문 독자라고 칭함에 동의하며 강인한 시인도 흔쾌히 시 전문 독자임을 내세운다. 여기에 현대 한국 시에 대한 신뢰와 권위가 담보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든든한 평가의 반석 위에 세워진 카페를 후배 시인과 시인 지망생들이 믿고 따른다. 그게 현재 4천여 명이다.
민족과 사회와 역사의 문제
고교 3학년 시절부터 시인은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을 응모하다가 동아일보 1966년 신춘문예에 당선한다. 「1965」라는 시였다. 그 해 내내 전 국민의 뜨거운 관심은 40년 동안 식민 지배를 한 일본과 식민 지배를 당한 대한민국이 도쿄에서 미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회담을 여는 문제였다. 일본에 대하여 굴욕적인 저자세 회담이 민족의 자존심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군사정부의 자세에 대하여 전국의 반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급기야 한일회담 자체를 문제 삼아 반대의 표현을 하는 자는 체포 구금되었다. 군사정부는 전국의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교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한여름 폭염 속에도 타오르는 들불처럼 한일회담의 민족적 요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졸속한 결말을 마다하지 않은 군사정부였다. 한편으론 수렁에 빠진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기도 한 것이 그해의 이슈를 한일회담으로부터 돌리진 못했다. 강인한 시인이 다룬 시의 주제는 슬픈 한민족의 문제였지만 에둘러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고 행간과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 년”이라는 후렴의 침묵 속에 감춰둘 수밖에 없었다 한다. 이 응모작은 동아일보에 당선되었다가 지방의 일개 대학신문에 발표된 이유로 당선이 취소되고 만다.
1966년 신춘문예의 좌절을 딛고 다시 1967년 시인은 1백행이 넘는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다. 민족의 문제, 사회의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한 시인의 초기 시는 이후 지난 역사의 문제들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유신의 암흑기에 시인은 상징의 기법으로 초현실주의적인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다룬 「밤 버스를 타고」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같은 시들이었다.
1967년 등단한 이래 오늘까지 56년 동안의 작품 세계를 시인은 말한다.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로, 공동체 사회에서 인류와 모든 생명체로 대상을 확대하여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시 세계는 마지막에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의 세계로 수렴하고 있다고.
시와 비시, 독자를 기만하는 자세에 대한 질정
백록시화(白鹿詩話)는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교직에 있으면서 시인은 해마다 학교 교지에 학생들에게 시에 관한 에세이를 발표하였다. 그 무렵 발표한 몇 편의 글이 1부에 포함되었고, 좀 더 깊이 있는 당대의 시 현실, 시와 비시에 대한 구분 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2부는 오늘날의 시단 현실에 나타난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한 진단이다. 주목할 만한 시인과 개별 작품을 들어 비평하였고, 시인이 독자를 기만하는 잘못 된 태도에 대한 반성적 비판도 덧붙였다. 3부는 강인한 시인이 시력 50여 년 동안 써온 작업 가운데 짚어야 할 부분이나 독자에게 약간의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시 30편에 대한 시인의 해설을 볼 수 있다. 4부는 시인의 에세이, 그리고 20여 년 동안 카페지기로서 혼자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카페 〈푸른 시의 방〉에 관한 대담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