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걸음으로 들여다보면
보이는 작고도 큰 세계
귀를 조금 더 기울이면, 마음을 활짝 열고 살펴보면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느린 걸음의 대명사인 달팽이가 첫 타자로 나온 이 동화집은 달팽이걸음을 빌려 아이들의 마음 언저리를 팽글팽글 맴도는 이야기들을 들으러 살며시 다가간다. 한 번도 돌본 적 없는 달팽이를 반려동물이라고 당당하게 발표한 진형이는 같은 반 친구 다민이에게서 달팽이의 이름이 뭐냐는 예기치 못한 질문을 듣는다. 진형이는 얼떨결에 성은 ‘달’이요, 이름은 ‘팽이’라고 답하고는 집에 돌아가 그동안 방치했던 달팽이를 들여다본다.
다민이 말처럼 정말 팽이 발에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진형이는 멍하니 팽이 발을 바라봤다. (…) 사악 사악. 진형이는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 동안. (29쪽)
여전히 진형이에게 달팽이는 징그러운 촉감을 지닌 존재일지라도 강아지도 고양이도 아닌, 달팽이를 반려동물로서 소중히 여긴 다민이 덕분에 이제껏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저 느릿느릿 걸어가는 줄만 알았던 달팽이에게도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고유한 걸음걸이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동화집에는 달팽이 외에도 아이들이 체험 학습이나 여행지에서 자주 마주하는 생명들이 등장한다. 형제는 바닷가에서 우연히 얻은 복어를 한참 데리고 놀다 풀어 주려는데 마침 한 아이가 그 복어를 자기한테 달란다. 어째서 너희만 실컷 갖고 노느냐는 심장에 콕 박히는 이야기도 덤으로 듣게 된다. 과연 복어는 누군가 ‘가질’ 수 있는 존재인 걸까?(「복어의 집」) 이처럼 『달팽이도 달린다』는 곁에 있어도 섬세하게 돌본 적 없고, 그저 하나의 놀이처럼 대하며 중요케 생각지는 않았던 생명들을 전면에 내세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가 한 번쯤은 가벼이 여겼던 생명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를 선사한다.
묻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고,
다가가지 않고도 지켜 줄 수 있는 마음
인간과 동물, 장애인과 비장애인, 어린이와 노인 등 이 세상의 모든 이가 다 함께 어울려 사는 데 필요한 건 무엇일까. 분명 모두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에 무엇보다 상대의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이 동화집에는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상대방을 의아하게 생각지 않고,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자세를 지닌 아이들이 등장한다.
전 재산 30,000원을 걸고 ‘작가와의 만남’에 초대한다는 희석이의 이메일을 보고, 주완이는 땡땡 작가가 오지 않을까 봐, 그리고 ‘우리 집에도 괴물이 있어요’라는 의미심장한 희석이의 한마디가 내내 마음에 걸려 본인도 작가에게 새로운 메일을 보낸다.(「땡땡 님을 초대합니다」) 한편 아역 배우로서 성금 광고 촬영을 처음으로 하게 된 하리는 연기가 영 어렵다. 그때 지현이에게서 친구네 이야기라는 가정사를 전해 듣고는 배역에 조금 더 몰입할 수 있게 되지만, 누군가의 사정을 떠올리며 연기를 했다는 사실이 어딘지 불편하고 마음이 쓰인다.(「잠바를 입고」) 그런가 하면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서 몸이 불편한 미주를 도와주던 유진이는 본인의 배려가 미주에게 무례한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최고의 좀비」)
모든 관계에 있어선 진심으로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중요하다. 이 동화집에선 여러 아이들이 살짝은 서툴지라도, 친구의 자존심을 지키고, 속사정을 받아들이면서 그 예의의 선을 적절히 지키고자 다분히 노력한다. 『달팽이도 달린다』에 나온 아이들처럼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이 세상은 조금 더 다정한 빛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에는
저마다 다른 파도가 일렁여요
우리 사회 어딘가에는 쉬이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일상을 각자의 속도로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황지영 작가는 하루하루를 씩씩하게 살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누구도 기죽지 않게끔, 달팽이 등에 태워 세상 밖으로 내보였다. 모두가 한마디씩 보태는 작가 초대에도 희석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장에 홀로 꿋꿋이 서서 땡땡 작가를 기다리고, 미주는 좀비 분장을 하고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동생과 동생 친구들을 데리고 핼러윈 행진에 나서며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최민지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기발하고 유쾌한 그림 덕에 아이들은 더 큰 날개를 달고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나러 나갈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우리 눈에만 잘 안 보일 뿐 달팽이도 엄연히 달릴 줄 안다. 부디 이 책의 독자들이, 그리고 이 세상의 어린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속도로 걷고, 달리고, 구르고, 미끄러지면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