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를 졸업했지만 일터가 실험실은 아닌, ‘범과학기술계’에서 일하며 과학을 읽고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동갑내기 여성이 있다. 한 사람은 과학기술학을 연구하고, 다른 한 사람은 과학전문지 기자를 거쳐 콘텐츠를 제작한다. 동갑내기라는 것 외에 두 사람의 공통점이 몇 가지 더 있다. 학창 시절 우유 급식이 반갑지 않았고, 과학을 좋아하고, 과학자를 꿈꾸었으며, 과학계의 구조적 모순을 무릅쓰고 과학을 잘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지금은 실험실 아닌 다른 곳에서 과학을 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이 과학책을 두고 각자의 삶, 세상과 세계, 그리고 과학을 이야기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적이고 다정하되,
깊고 진중히
두 사람이 고른 과학책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필독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빠짐없이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독서’와 마찬가지로 세상과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과학적 사실과 진리를 밝히기 위해 도전하고 노력한 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들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살아온 과정에서 마주한 문제나 관심을 통해 고른 책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실험실이 일터가 아니어도 살면서 과학책을 가까이한 것이 과학을 좋아하는 당사자들에게는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과학책을 우주의 진리나 세계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고민과 관심에 따라 읽을 수 있고, 그래도 된다는 새로운 지평으로 다가온다.
살아온 환경, 경력과 성격 그리고 일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사려 깊게 이어진다. 공부하는 건물에 남자 화장실은 층마다 있는데 왜 때문인지 여자 화장실은 그렇지 않았던 경험이나 『코스모스』와 『이기적 유전자』를 완독하지 못했다는 은근한 고백에서 맞장구를 치고,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과학계에서 남성은 하지 않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느라 애써야 했던 억울함과 서러움을 떠올리는 대목에서는 서로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삶은 과학책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과학에 대한 생각과 의견을 말하는 데서 명징해진다. 과학의 탄생 이래 인류에게 던져진 숙제와도 같은 질문인 “왜 과학계에 여성이 필요한가”에 대한 답에서부터, 젠더와 인종 문제에 과학이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 이유, 과학자 사회가 차별과 불평등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다양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가 과학계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까지 두 사람의 대답은 하나로 모아진다. 그렇게 해야 더 믿을 수 있는 과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을 이미 갖춘 것으로 ‘믿어지는’ 과학을 더 믿을 수 있으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결국 과학이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두 사람이 누구보다 못지않게 과학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과학책, 비장하게 읽으면 핵노잼,
나만의 이유로 읽으면 대유잼
두 사람의 과학을 사랑하는 마음이 처음부터 컸던 것은 아니다. 살면서, 과학책을 읽으며 깊어져 갔다. 이는 두 사람의 대화 곳곳에서 묻어난다. 두 사람이 과학책을 통해 넓히는 것은 비단 과학적 지식과 세계에 대한 이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살면서 전혀 몰라도 될 성싶은 과학적 지식을 정직하게 풀어낸 글을 보며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절경을 보는 듯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 외에도 세계를 관찰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리를 찾기 위해 헤매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도전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에서 위로를 받기도 한다. 나아가 과학계의 모순을 피하지 않고 부딪혀 나간 과학자들의 삶을 통해 과학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고 어쩌면 좀 괜찮은 할머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발견한다.
과학책을 두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나’에서 시작해 여성과 소수자, 인류와 지구, 과학의 본질을 거쳐 다시 ‘나’로 돌아오는 궤적을 그리며 커다란 동그라미를 만든다. 그 동그라미는 과학책을 통해 나의 삶과 인류의 미래를 함께 살펴볼 수 있음을, 과학책을 읽는 것이 과학적 지식을 얻는 것보다 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지금의 세계와 앞으로의 세계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이해하고 성찰하고 상상하는 여정이 과학책을 통해 시작될 수 있음을, 그것이 나와 거리가 먼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무척 상관있는 여정임을 보여준다.
그 동그라미가 그려지는 동안 두 사람의 평행세계는 서서히 이어진다. 과학책을 좋아하지만 읽는 이유도 방식도 달랐던 두 사람은 대화 속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있을 때 거기서 멈출 것이 아니라 그냥 넘어가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 과학책에서 삶의 복잡한 문제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위로를 얻는 것이 과학책을 비판적으로 읽는 것 못지않게 꽤나 근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게 자신을, 그리고 마주한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한 두 사람은 앞으로 좀 더 사소한 이유로 과학책을 찾게 되기를, 너와 나를 이해하기 위한 과학책 읽기가 계속 되어가기를 기약한다. 자연스레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떤 과학책을 읽어나갈지, 과학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