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학교. 일 등이 되어 졸업하면 어떤 과정으로 주인이 된다는 걸까. 만약 일 등이 되지 못하고 탈락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곳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 나간다면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만약 교장의 말대로 학교에서 고난을 이겨내고 졸업을 하면 정말 과거의 나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가. 이 괴상한 학교는 무엇으로 그것을 보장할 것인가.
한서정은 뒤척거렸다. 어둠이 소리를 집어삼킨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 전체가 죽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 고요가 먼 과거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자꾸만 기억이 떠올랐다. 어째서 사람은 고요하고 어두운 곳에 혼자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과거를 돌아보게 되는 걸까. 찰나의 순간순간이 장면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그 피. 붉고 선연하고 소름 끼치도록 맑은 피.
한서정은 김현수가 흘리던 피를 떠올렸다. 애써 피하려고 해도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1권 58~59쪽)
‘무엇이 됐든, 어떤 상황이든 한번 주어진 조건은 변경하지 못한다.’
이것이 하인학교의 방침이었다. 덧붙이자면 이런 의미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뚫고 나가야 한다. 나중에 타깃에게도 내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당신이 그것을 바꾸라고 말하겠는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고 있으므로 누군가를 더 배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모두 학생 개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그러므로 방침대로라면 소시지가 상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서정 개인의 상황일 뿐이었고, 한서정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어쩐지 이상했다. 누군가 계속해서 방해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수업 시간에 임박해 신고 나가야 할 신발이 없어진다든지, 분명 새로 빨아 널어놓았는데 교복에 시꺼먼 물감이 쏟아져 있다든지, 꼭 필요한 수업 교재가 사라진다든지…….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방해하는 것 같았다. 매우 주의 깊게, 제대로 훈련받지 못하도록.
(1권 257쪽)
“질문 하나만 더 할게요.”
이진욱이 바다에서 거둬들인 시선을 백도현에게 고정했다. 배 위는 호화로웠다. 색색의 불빛으로 달빛이 무색했고 향기로운 음악과 치솟듯 높은 웃음소리가 밤바다를 흔들어 깨웠다. 어쩐 일인지 백도현은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하고 쌩하니 뒤돌아 가지 못했다. 이진욱에게는 그런 힘이 있는 듯싶었다. 까닭 모르게 상대를 긴장하게 만드는 힘.
“신데렐라 이야기는 재투성이 소녀가 우여곡절 끝에 성으로 들어가 왕자와 결혼하며 끝나요.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죠. 구두를 잃어버리고 계속되는 불행과 고통 속에서 한숨 쉬어요. 왕자가 구두 주인을 찾으러 다니는 걸 알았을 때,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구두가 더러운 재투성이에서 성안의 왕자비로 수직 상승 하는 단 한 장의 티켓이라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요? 소녀는 알았어요. 결국 다시 구두를 손에 넣게 된 소녀는 성공적으로 안착한 왕자비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슨 일까지 서슴없이 했을까요? 유리 구두의 마법이 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에요.”
소녀는 깨지기 쉬운 유리 구두를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했을까. 이진욱의 물음에 백도현은 그가 그냥 동화 얘기나 하자고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2권 48~49쪽)
“강준석은 타깃이야. 네가 딛고 오를 발판이지. 그런데 넌 마음을 쏟고 있잖니. 그것이 약점이 될 줄도 모르고. 내가 강준석을 무너뜨리면 어떻게 될까. 너의 마음은 무너지고 너의 미래도 망가지겠지. 발판이 없어지니까. 모든 것이 부서지는 거야. 그 이후에도 네가 살 수 있을까?”
한서정이 전금희를 노려보았다. 처음엔 전금희가 과거를 이기고 스스로를 극복하고 미래를 쟁취한 큰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분명 그녀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무섭잖니. 그 노인네, 하인학교가 지금껏 모아온 정보와 힘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끝까지 안 내놓을 작정이야. 그 전에 가져와야 해. 그게 뭔지 아니? 무소불위의 칼이야. 누구도 대적 못 할 힘이라고. 세상을 바꿔야 해.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게 나의 사명이었어. 그러려면 더 큰 힘이 필요해.”
전금희는 어디까지 올라가기를 욕망하는 걸까. 목적지가 이 나라의 꼭대기라도 되는 걸까?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고? 그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그것이 욕망의 다른 이름은 아닌가? 그 욕망을 위해 전금희는 자기를 키워준 정이화를 제거하려 했다.
“선택해. 강준석의 운명이 네 손에 달렸어.”
(2권 2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