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격적인 1분’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과연 한국에 몇 퍼센트의 가능성이 있었을까. 미국 통계 업체인 파이브서티에이트는 당시 한국의 16강행 가능성을 9퍼센트에 불과하다고 예측했다. 하지만 황희찬이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골을 터트렸다. 즉 선수들과 코치진이 한국의 월드컵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며 나머지 91퍼센트를 채웠다.
스페인의 매체 마르카는 황희찬의 골 장면을 두고 “충격적인 1분”이라고, AP통신은 “월드컵 92년 역사에서 가장 격정적으로 마감된 조별리그”라고 묘사했다. 영국 매체 더 선은 ‘incredible’과 ‘KOREA’를 합해 ‘IN‑KOR‑REDIBLE’이라고 표현했다. 잉글랜드 축구 전설인 앨런 시어러는 “정말 대단한 순간이다. 우리가 본 장면에는 드라마와 눈물, 기쁨, 흥분, 괴로움 모두가 섞여 있었다”고 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 수비수 출신인 리오 퍼디낸드 역시 “어떤 스포츠가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라며 놀라워했다.
손흥민은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토트넘 소속으로 유럽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뛰던 중 상대 선수와 부딪쳐 안와 골절상을 입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1퍼센트 가능성만 있어도 앞만 보고 달리겠다’는 글을 써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안면 보호 마스크를 들고 카타르에 도착했다. 수술을 받은 지 불과 20일 만에 풀타임을 뛰었다.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던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선 후반 추가시간 70~80미터를 질주해 기적의 어시스트를 만들어냈다.
ESPN의 샘 보든 기자는 카타르 월드컵 중 최고 순간으로 ‘손흥민의 눈물’을 꼽으면서 이렇게 찬사를 보냈다.
“내게 가장 순수한 긴장감과 드라마틱한 감정을 준 순간은 H조 3차전 마지막 10분이었다. 포르투갈을 꺾은 한국, 우루과이와 가나의 시합이 끝나기를 바라는 믿을 수 없는 기다림, 마침내 끝났을 때 손흥민이 경기장에서 흘린 눈물, 이 모든 것은 월드컵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순수한 황홀감이었다.”
4경기 모두 풀타임으로 뛴 손흥민은 월드컵을 마칠 때쯤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1퍼센트의 가능성이 정말 크다고 느꼈다’고 썼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을까.
◎ 현장 취재와 인터뷰의 실감
저자는 카타르 월드컵 당시 경기 현장과 공동 취재 구역인 믹스트 존에서 선수들과 인터뷰하고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대회가 끝나고 돌아와서는 한국 소속 팀의 클럽하우스 등에서 선수별 인터뷰를 별도로 진행했다. 여기에 국내외 언론 매체들이 보도한, 카타르 월드컵에서 활동한 한국 축구 대표팀의 활약상을 빠짐없이 망라했다. 또 주요 축구 통계 업체와 사이트들이 분석한 경기별, 선수별 기록 등을 꼼꼼히 체크했다.
우루과이와의 1차전을 일주일여 남겨둔 시점, 도하의 알에글라 훈련장.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손흥민은 왼쪽 눈 위에 수술 자국이 뚜렷했다. 붓기도 선명했다. 훈련장에서 벤투는 고민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의료진은 밤낮으로 끝까지 몸 상태를 체크했다.
현장에서 손흥민을 보니 그가 왜 수술 날짜까지 앞당겼는지 좀 더 와 닿았다. 국가가 연주될 때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는 각국 선수들이 많았다. 선수들은 소속 팀에서보다 더 미친 듯이 뛰었다. 모든 축구 선수가 뛰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꿈. 월드컵은 그런 무대였다.
우루과이전이 끝나고 공동 취재 구역인 믹스트 존에서 만난 손흥민은 얼굴이 더 부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괜찮습니다”를 반복했다. 그는 덤덤히 말했다.
“나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마스크를 쓰고 경기를 하는 선수가 있다. 불편해도 나라를 위해 뛸 수 있다는 일 자체가 큰 영광이다. 축구를 하다가 맞으면 맞는 거다. 그런 두려움은 없었다.”
조규성은 우루과이전에서 추가시간까지 24분 남짓 뛰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전 세계 팬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TV 중계 카메라가 교체 투입을 앞둔 그의 잘생긴 얼굴을 클로즈업한 뒤 그의 소셜 미디어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가파르게 늘었다.
황희찬은 황소처럼 저돌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최고 속도 시속 32.8킬로미터로 그라운드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하루라도 빨리 뛰고 싶었던 그는 훈련이 끝나면 햄스트링 붓기를 줄이기 위해 얼음찜질을 했다. 카타르의 한낮 기온은 30도를 웃돌았지만 그는 날씨가 덥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얼음통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황인범은 조별리그 3경기에서 총 36.271킬로미터를 뛰었다. 이런 놀라운 활동량은 조별 리그에 출전한 전체 선수 중 8위에 해당했다. 서울 광화문에서 경기도 수원까지 뛴 셈이다. 시속 20~25킬로미터로 빠르게 뛰는 스프린트 부문에서는 총 463회를 시도해 전체 13위에 올랐다. 192개 패스를 성공시키고 202번 볼을 받기 위한 움직임을 보여 팀 내 최다를 기록했다. 특히 파이널 서드 지역 패스 89회를 기록해 이 부문 3위에 올랐다.
◎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포르투갈전이 끝난 뒤 조규성과 권경원이 든 태극기에는 ‘Impossible is nothing’ ‘Never give up’이라는 문구와 함께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악조건이 마침내 기회를 만들었다. 선수들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투혼을 발휘했다. 손흥민이 월드컵을 앞두고 ‘1퍼센트 가능성만 있다면 앞만 보고 달려가겠다’고 말한 것처럼, 선수들은 그 가능성을 보고 진짜 달려갔다.
선수들 사이에서 화제로 떠오른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는 그들을 달리게 한 원동력이 됐다. 조별리그가 길어질수록 선수 대다수는 헛구역질을 하고 밥도 잘 먹지 못했다. 황인범은 머리가 터져 출혈이 발생했지만 붕대를 벗어 던지고 뛰었고, 손흥민은 뼈가 잘 붙지도 않은 데다 안면 보호 마스크를 써서 답답한 상황에서도 뛰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16강에 못 가면 말이 안 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 문구는 선수들이 승리를 쟁취하려고 ‘뜨거운 가슴’으로 플레이하는 중에 나왔다. 적극적인 몸싸움에 나중에는 붕대를 내던지고 뛰고, 안면 보호 마스크를 손에 쥐고 뛰고,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몸을 던지는 모습은 지친 동료들을 한 발 더 뛰게 하는 동기부여가 되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