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매의 역사적 탄생과 죽음을 가로지르며 마주하게 되는
새로운 삶의 윤리와 생태적 상호 의존성에 관한 생생한 기록!
에어컨과 자본주의의 ‘공모’
노동에 최적화된 신체의 탄생
에어컨이 없는 여름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인류는 에어컨 없이 더위를 수천 년을 견뎌왔다. 온도를 낮추는 방법은 ‘증발 냉각’이 유일했다. 액체가 증발되면서 주변 공기가 식는 아주 단순한 원리, 과거의 많은 문화권이 이런 현상을 알고 있었지만 실내 공기를 시원하게 할 수는 없었다. 흥미롭게도 인간의 쾌적함을 목적으로 한 최초의 완전한 냉방 시스템은 쾌적함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닌 자본주의의 지속을 위해 설계되었다. 1890년대 난방과 환기시스템으로 유명했던 알프레드 울프는 쾌적함을 목적으로 고안된 세계 최초의 완전한 냉각 시스템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은 뉴욕증권거래소 현장의 거래원들이었다. “뉴욕증권거래소는 고전 자유주의 경제학의 정신에 따라 자본의 흐름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장벽과 한계를 없애고자 했다.”
에어컨은 공기를 제어했지만, 공기를 제어할 때 그 안의 프로세스와 사람들도 제어했다. 우리는 실내 온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더 오랜 시간 일하게 되었다. 쾌적하고 안락한 실내 환경은 ‘노동하는 몸’을 더욱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지적한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신체의 강제’가 이루어진 공장과 학교에서 초기 기계 냉각이 발전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최고의 대기 상태’는 유용하고 효율적인 인간의 몸을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야 하는 기술적 결과였다. 자본주의 사회가 엄격하고 체계적인 근로 조건에서 노동자를 재생산하려고 한다는 생각은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동자들이 덥고 습한 여름 기후 때문에 다음 날 생산력에 차질이 생긴다면 “생산 수단의 소유주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노동자들의 일을 줄이는 것(그러면 소유주는 손해를 본다)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 공간의 기후적 … 특성’을 바꾸는 것이다. 에어컨의 부상은 두 번째 안이 선택되었다는 증거다.” 에어컨 업계의 전략은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열적 쾌적성에 관해 그들이 가정한 것은 여전히 주로 우리 몸의 한계, 지속적인 노동의 필요성, 무한한 에너지, 이상적인 기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서구의 가정이다.”
초기의 에어컨 산업은 ‘불편함’을 ‘구식’적인 것,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것을 진보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며 예전에 논란이 일었던 ‘나쁜 공기’, ‘집단 독’처럼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몰아갔다. 그렇게 “유독한 생활 수준을 안전한 것으로 인식되도록 세상을 세뇌시켰다. 편안함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갈망하고 획득해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알지 못했던 냉매
그리고 냉매를 파괴하는 일
2017년, 한 비영리 환경단체가 기후 변화 대처를 위한 대책 100가지를 내놓기 위해 전문가들을 모았다. 200명이 넘는 연구원들이 관련 자료를 모으고 수치를 계산한 결과, 1위는 바로 ‘냉매 관리’였다. 기후 변화에 대한 대책으로 풍력 터빈, 태양 에너지, 음 식물 쓰레기, 숲 보존 등에 대해서는 들어봤지만, 냉매 관리는 다소 생소하다. 게다가 (너무 생소해서 진지하게 다가오지 않는) 냉매 관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특정 개인과 상관없는 일로 보인다. 도대체 누가 냉매라는 것을 관리할까? 적어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는 냉매에 의존해 살지만, 이토록 냉매에 익숙하지 않은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거의 가늠할 수 없는 양의 냉매를 성층권으로 쏘아 올렸지만, 지금도 그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냉매를 분리하거나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향후 30년 동안 897.4억 톤의 이산화탄소배출을 막을 수 있다. 이는 대략 올림픽 수영장 3,600만 개를 모두 채운 물의 무게 또는 지구상에서 가장 무거운 생물인 흰긴수염고래 약 9억 8,940만 마리의 무게와 비슷한 양이다.” 꽤 희망적이지 않은가? 냉매를 파괴하는 일, 이것만 제대로 해결해도 우리는 전 세계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근본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이 책의 탁월함은 기후 위기에 대한 고민을 쌓아놓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는 데 있다. 저자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냉매 회수 업자 샘의 거래 현장에 동행하기로 결심한다. 구식 냉매 형태의 오염물질을 파괴하는 친환경 에너지 회사에서 일하는 샘은, 구입한 프레온을 파괴함으로써 캘리포니아의 배출권 거래제를 통해 ‘탄소 배출권’을 얻는다. 그리고 배출권을 다시 탄소 시장에 팔아 이익을 낸다. 캘리포니아의 기업체들은 탄소 배출권을 사들여 주에서 규제하는 한도 이상으로 환경을 오염시킬 수 있다. 그는 샘과의 여정을 통해 배출권 거래제가 내포한 정치적 위선과 한계, 그리고 제도적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열망과 신념의 무게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흰 피부와 검은 조약’
세계 유일의 환경 국제 협약이 지키고자 했던 것
1987년 9월, 몬트리올 의정서는 프레온의 주요 생산국이자 배출국인 호주, 캐나다, 미국, 서유럽, 동유럽의 지원 아래 채택되었다. 공교롭게도 프레온의 주요 생산국과 배출국은 지구상의 대다수 백인들이 거주하는 나라들이었고, 이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1987년 초, 미국 환경보호국은 CFC 위험도 평가 결과를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CFC로 인한 오존 파괴가 생태계 붕괴뿐만 아니라 피부암의 급속한 확산을 가져올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주요 언론은 충격적인 오존층 파괴의 전 세계적 영향을 잠시 인정했지만, 오존층에 대한 관심은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다. 대신, 압도적으로 피부암에 집중했다. 미국에서는 자외선이 일으킨 가장 공격적인 형태의 피부암인 흑색종의 발병 건수를 기록해왔는데, 흑색종에 걸릴 확률을 높이는 위험 요소에는 ‘백인인 것 자체’도 포함된다. 여기서 저자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미래의 환경 파괴를 막는 세계 유일의 국제협약으로 여전히 칭송받고 있는 몬트리올 의정서가 다른 무엇보다 흰 피부를 겨냥하지 않았다면 그 위기를 인식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 만약 프레온이 주로 흑인과 유색인을 위협하는 방사능을 불러왔다면, 우리는 합의를 이룰 수 있었을까?”
개인적인 편안함,
그 편안함은 누구의 것인가?
2019년 여름, 38°C에 이르는 폭염이 3일 동안 지속되었을 때, 전기 공급회사 콘에드는 브루클린 남동부 지역에 일부러 전기 공급을 끊었다. 다른 지역의 전기 보전을 위한 선제적인 조치였다고 밝혔다. 상대적으로 백인이 더 많고, 더 상업화된 지역의 ‘에너지 시스템 보전’을 위해 흑인과 유색인 노동자층의 거주 지역을 브루클린의 나머지 지역과 도시 전체에 ‘완충 지대’로 삼았던 것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대형 요양 시설의 노인들과 유아를 포함해 5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24시간 이상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한 전기 회사가 고의로 일으킨 정전 사태는 개인 냉방의 모순된 문제를 확실히 드러낸다. 또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냉방 시설에 대한 접근이 보장될 필요가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도시의 폭염에서 누가 살아남고 살아남지 못하느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냉방 장치의 소유 여부와 관련이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에어컨을 구입할 여유가 있다 해도, 에어컨을 가동할 에너지는 감당할 수 없을지 모른다. 또 설령 에어컨과 에너지 모두를 감당할 수 있다 해도, 우연이든 고의든 연중 가장 더운 시기에 보통 발생하는 정전에 직면하면 에어컨은 아무 쓸모가 없다.
따라서 환경 위기에 대한 도구적, 혹은 기술적 해결책은 일부를 위한 해결책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사회적 체계, 구조에 있다. 도시 설계와 인종·계급에 따른 구분이라는 더 광범위한 문제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무료 에어컨 제공’ 같은 손쉬운 해결책은 조기 사망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조건을 유지할 뿐이다. 환경 정의를 위해서는 1) 지역사회가 통제하는 재생 에너지 공급이 필요하고, 2) 에너지가 적게 들고 환기가 잘 되는 건물, 그 안에서 지내기 위해 아무것도 구입할 필요가 없는 공공 냉방 공간, 더 나은 공원 관리와 공원에의 접근성 그리고 인종과 소득으로 여전히 분리된 공간들의 통합에 관심을 가지고 그러한 공간을 재설계해야 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환경 운동이 개인의 ‘희생’에만 몰두한다면 이는 언제나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계몽, 설교, 수치심, 물질적인 편안함을 포기하라는 요구 등의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적 편안함의 추구가 결국 우리를 왜 좀 더 편하게 만들지 못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에어컨이나 모든 종류의 편안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냉방 장치의 버튼을 누를 때마다, 인공적으로 냉방된 공간에 들어갈 때마다, 냉동실을 열 때마다, 즉 이러한 일상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서로에 대한 우리의 막중한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핵심은 편안함을 우리 일상에서 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에 대한 우리의 정의의 바꿔야 하는 것이다. ‘누가 편안함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관점에서 편안함을 정의하는가’의 문제다.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지점에 의문을 갖고, 우리의 편안함이 다른 사람들의 불편함을 조건으로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편안함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잃기 시작할 수 있다.” 그는 묻는다. 과연 우리가 마땅히 누린 개인적인 편안함 뒤에는 무엇이 오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