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한 영상과 서사에 대한 뉴트로적 매력 - 〈전원일기〉 열풍
〈전원일기〉가 1088회로 종영된 것이 2002년으로 20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한물간 옛 드라마로 취급될 수도 있겠으나(최초 방영일 기준으로는 42년이 되었다), 웬일인지 최근 케이블 채널과 OTT를 중심으로 때아닌 〈전원일기〉 열풍이 세차게 불고 있다. 2021년 OTT에서는 인기 드라마 순위 톱 10에 오르는 기현상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요즘 젊은 세대들이 이 드라마를 많이 본다는 것인데, 이에 관한 문화평론가 등 전문가들의 분석은 이렇다.
- 젊은 세대들에게 〈전원일기〉는 ‘빈티지한 영상과 서사에 대한 뉴트로(newtro)적 매력’이 강하고,
- 갈등만이 첨예화된 요즘 드라마들과는 달리 ‘화해에 초점이 맞춰진 휴먼드라마’여서 안정감을 주며,
- ‘몰입을 요하지 않는, 불멍처럼 볼 수 있는 드라마’여서 언제 어디서나 보아도 좋다.
“절망하지 않기 위해 썼다” - 차범석이 〈전원일기〉를 쓰기까지
〈전원일기〉를 처음으로 쓴 작가가 차범석(1924~2006)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던 1980년 5월, 차범석은 “내 고향 사람들이 죽어가고 쓰러지고, 내 고향 땅이 흔들리고 파이고, 내 고향 산천에 총탄이 쏟아지고 핏자국이 낭자하다는데, 어찌 우리가 안일하게 연극을 하고 있겠는가?”라면서, 공연을 앞두고 하고 있던 연극 연습과 2주 정도 남은 공연을 모두 취소했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지내던 때, MBC의 젊은 PD 이연현이 차범석을 찾아왔다.
이연현 PD는 “이를테면 농촌을 소재로 한 편의 수필을 써 주면 된다.”면서 농촌드라마 〈전원일기〉 집필을 제안했는데, 차범석에게 집필을 제안한 이유는 “인생을 조금은 관조해 왔고, 그 아픔과 깊이를 뚫어보는, 나이든 극작각”였으면 했기 때문이다. 차범석은 평소에 ‘왜 TV드라마는 도시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가?’라는 점과 ‘왜 TV드라마는 천편일률적으로 사랑 타령만 하면서 서민층이나 지역사회와는 담을 쌓는가?’라는 불만을 품어 왔던 터였기에 집필을 승낙했고, 이로부터 국민드라마 〈전원일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 차범석은 연극과 달리 방송은 자신의 주된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방송과 연극이 모두 민중을 위한 정신문화”이며 “이 두 매체가 상부상조하게 되면 언젠가는 하나의 길로 귀결될 수도 있다.”고 믿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좀 더 큰 시각으로 보자면, 제5공화국 정부는 5ㆍ18 직후 “퇴폐적이고 저속한 사회 분위기를 정화”한다는 명분 아래 방송사에 국민 정서순화 드라마 제작을 강요했고, 이에 따라 방송사들이 적극적으로 정서순화 드라마 제작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MBC가 농촌드라마 〈전원일기〉를 기획한 것이었다.
훗날 차범석은 〈전원일기〉를 쓰게 된 이유를 “오늘의 농촌 실상을 도시인에게 보여 주고 잊혀져 가는 풍물이나 인정을 되살리자는 의도”도 있었지만, “절망하지 않기 위해 썼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갈등의 잔해’를 남기지 않는 드라마 - 〈전원일기〉의 형식적 포맷의 정립
전성희 교수는 “〈전원일기〉의 첫 화에서 차범석은 형식상의 포맷을 정립, 그 진행 방식은 〈전원일기〉의 특성이 되었다.”면서, 당시 드라마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내레이션을 극의 시작과 끝에 배치해 안정감을 주었다고 말한다.
또한 “본래 〈전원일기〉가 잔잔한 한 편의 수필 같은 드라마를 지향했기 때문에 갈등의 극대화 대신 ‘갈등의 잔해’를 남기지 않는 드라마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가질 수 있었”고, “장수 드라마로서 한국 TV 드라마 역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면서, “그 기반이 〈전원일기〉 초기 차범석의 대본을 통해 마련되었으며, 이후 22년간 긴 여정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부권은 있으나 허점도 있고 허세도 부리는 김 회장 캐릭터의 탄생
- 〈전원일기〉 첫 화 「박수 칠 때 떠나라」
〈전원일기〉 제1화 「박수 칠 때 떠나라」는 1980년 10월 21일 방영되었다.
동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회장님이라고 불리는 아버지는 농협회에 갔다가 면에서 열리는 체육대회에 참가한다. 소싯적 기운깨나 쓰던 아버지는 술김에 씨름판에서 둘째 아들과 대결을 한다. 둘째는 아버지와의 대결을 피하려 하지만 막무가내다. 대결 끝에 아버지는 결국 패하고 허리까지 다친다. 일용네에게 아들과 아버지의 씨름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씨름판으로 쫓아오고, 아픈 아버지에게 “늙었는데 안 늙은 척해 보이려는 심뽀”라며 지청구를 한다. 이런 아버지 이야기에 딸을 보러 서울 간 할머니가 예정보다 빨리 귀향하여 자신의 이른 귀향에 대해 궁금해하는 김 회장에게 “떠나지 말라고 아우성칠 때 떠날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한 할머니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김 회장의 내레이션으로 제1화는 마무리된다.
‘시추에이션 홈 드라마의 성립조건 중 중요한 것은 캐릭터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김 회장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그 시대의 아버지, 아직은 가정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가족을 책임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잘 재현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부권은 있으나 약간의 허점도 있고 허세도 부리는 김 회장의 인물 설정에 반응했고, 별 갈등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진행 방식이 오히려 호평을 받았다. 이 점이 〈전원일기〉가 롱런할 수 있었던 큰 이유였다.
용식이와 일용이는 결혼도 안 했고, 영남이와 복길이는 태어나지도 않은
태곳적 〈전원일기〉 이야기
차범석 작 〈전원일기〉는 그야말로 ‘태곳적 전원일기’라 할 수 있다. 김 회장의 둘째 아들 용식이와 일용네의 아들 일용이는 결혼도 안 했고, 그래서 영남이와 복길이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금동이도 없는 상태로 시작된다.(8화에서 영남이가 태어나고, 33화에서 금동이가 김 회장 댁에 입양된다)
드라마는 김 회장의 가족(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첫째, 며느리, 둘째, 셋째, 막내)과 일용네 식구(일용네와 일용)가 주축을 이루고, 간간이 김 회장의 사돈댁 사람들이 등장하는 구조를 유지하다가, 회차가 거듭될수록 면장, 이장(아내와 아들 순종), 주모, 수원댁, 철수 엄마, 철수 아빠, 이식, 삼수, 동길, 성삼 등 마을 사람들이 고정 역할이 되어 등장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부녀회장, 쌍봉댁, 응삼이, 창수, 귀동이, 숙이 엄마, 섭이 엄마 등은 훨씬 뒤에 한 명 한 명 등장하여 드라마의 살집을 키우고 재미를 돋운다.
이처럼 차범석의 〈전원일기〉는 이후 22년간 지속되는 이 드라마 서사의 원형적 상태를 보여 준다. 비교적 젊은 김 회장(최불암 분), 새댁이라 불리는 첫째 며느리(고두심 분), 20대의 앳된 청년인 둘째(유인촌 분), 대학생으로 출연하는 셋째(김영란 분) 등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남아 있는 2화와 27화 영상을 보면 이해가 쉽다) 이 대본집을 읽어 나간다면, 우리가 익히 알던 훨씬 나중의 〈전원일기〉 배역과 오버랩되면서 독특한 재미를 준다. 대본집을 읽는 내내 쉽게 영상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도 특징 중 하나다.
세 권으로 출간된 〈차범석의 전원일기〉에는 모두 42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여기에는 농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이농, 가족 간의 갈등, 하곡 수매가, 수입 소고기, 농약의 과다 사용, 농촌 청년의 결혼, 입양, 결혼에서의 혼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한편, 엮은이 전성희 교수는 대본집 세 권을 정리하면서 제1~49화의 방영 기록도 정리해 실었는데, 기존의 오류들을 바로잡았기에 방송극 〈전원일기〉 연구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