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조정안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적대 세력에 둘러싸여서 가까스로 왕위를 계승한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탕평책을 적극 천명하고 강력하게 추진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선조대 이래 각 당파의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정조가 직접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편찬한 것이 바로 이 「황극편」이다. 따라서 이것은 국왕의 입장이 강하게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당론서와 구별되며, 정조 탕평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탕평책을 뒷받침한 정치론이 바로 탕평론(蕩平論)이었는데, 이는 숙종대 박세채(朴世采)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출되었다. 숙종 즉위를 전후하여 남인과 서인이 교대로 집권하면서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박세채는 탕평론을 제출하여 이를 수습하려고 하였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는 정책 마련을 위해 그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으로 보았으므로, 여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붕당(朋黨)은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선조대 이이(李珥)의 파붕당론을 계승한 것으로서, 중국 송대 구양수(歐陽脩)의 붕당론(朋黨論)에 근거한 주자학 정치론은 조선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배층 다수가 주자학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으므로 탕평론이 신료들 다수에게 수용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박세채는 탕평론의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유교의 대표적 경전인 「서경(書經)」을 끌어들였다. 즉 그 「홍범(洪範)」편에 보이는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하나인 ‘황극(皇極)’을 인용하여 황극탕평론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은나라 말기의 현인이었던 기자가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제시한 정치의 대원칙이 바로 홍범구주였는데, 여기에는 유교 경세론의 기본 얼개가 모두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5번째에 보이는 ‘황극’은 정치에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며, 이것은 군주가 체현한다는 인식이 담겨있다. 그 객관적 기준이란 민생 안정을 통한 국가의 유지ㆍ보존 내지 발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황극탕평론은 이에 입각하여 붕당의 존재나 붕당의 의리는 그러한 대전제 아래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고, 그것의 존립이나 정당성 여부는 군주가 결정한다는 국왕 중심 정치론이었다.
정조는 이러한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을 수용하여, 오직 ‘황극’을 통해서만 붕당을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파붕당론의 당위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즉 송대와는 다른 조선의 현실에 근거하여 황극을 내세우면서, 구양수 붕당론을 계승한 주자학 정치론을 완곡하게 부정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본서가 ‘황극편’이라는 제목을 채택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황극편」은 1572년 선조대 동서 분당부터 영조가 특명으로 이광좌(李光佐) 등 소론 탕평파 대신들의 관작을 복구한 1772년까지 국왕대별로 편년체로 편찬되었다. 전체가 13권인데, 각 권별로 맨 앞에 주요 당색을 밝혔다. 권1~3은 ‘동서’, 권4~6은 ‘서남’, 권7~13은 ‘노소’라고 세로쓰기로 표제를 붙이고, 권3에는 ‘남북’, 권4에는 ‘대북ㆍ소북’, 권6에는 ‘노소’, 권13에는 ‘준탕(峻蕩)’이라고 쓴 작은 글씨를 괄호쓰기로 붙여 놓았다. 이로써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대북과 소북,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본서에서 거론되는 주요 당색임을 알 수 있다. 왕대별로 보면 권1~권3은 선조, 권4는 선조~현종, 권5~권8은 숙종, 권9~권11은 경종, 권12~권13은 영조대 사건을 수록하였다.
본서의 역주자 세 사람은 모두 조선시대 정치사, 정치사상사 전공자들로서 다년간에 걸쳐서 당론서 번역 사업을 수행해왔는데, 이 「황극편」 13권 전체를 4책으로 나누어 「황극편」 권1~3을 「황극편 1」로 2022년에 출간하였고, 이번에 권4~6을 「황극편 2」로, 권7~9를 「황극편 3」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황극편 3」은 「황극편」 권7~9까지를 번역하고 주해한 책이다. 권7은 1696년(숙종22)부터 1715년(숙종41)까지, 권8은 1716년(숙종42)부터 1720년(경종 즉위)까지, 권9는 1721년 1년을 각각 대상으로 삼았다. 앞선 「황극편 2」가 시기적으로 약 1백년에 걸친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이 「황극편 3」은 25년이라는 짧은 시기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황극편 2」와 거의 비슷한 분량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이 시기에 당쟁이 격렬해져서 점차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본서의 주요 내용은 부제가 모두 ‘노소(老少)’로 되어 있듯이, 노론과 소론의 본격적인 다툼을 다루고 있다. 대체로 숙종대 회니시비(懷尼是非)와 「예기유편(禮記類編)」, 「가례원류(家禮源流)」 등을 둘러싼 갈등을 거치면서 소론이 주도한 탕평책이 노론의 반발로 좌절되는 양상을 소개하였다. 특히 숙종이 서거하고 경종이 즉위하였는데, 자식이 없고 병치레가 잦아서 그 후계구도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즉 왕위계승 문제가 당쟁과 결부되어 전개되는 파국적 양상이 포함되었다.
특히 노론 4대신이 주도했던 연잉군(延礽君)으로의 세제 확정과 대리청정은 국왕과 소론 일각의 반발을 사서 신임옥사의 발단이 되었다. 1721년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된 소론 일각에서 세제를 부정하는 시도가 나타난 것 역시 노론과 유사한 잘못을 반복한 사례였다. 양측간에 벌어진 극심한 대립과 불신은 영조대 국왕 주도로 탕평책이 추진되는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바로 이어져 내년에 출간될 「황극편」 권10~13는 경종대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발생한 사건들과 함께 우여곡절을 거쳐서 즉위한 영조가 이러한 난국을 어떻게 해쳐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극편」은 정조가 탕평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붕당으로 분열되어 있던 신료들을 설득하여 정치에서 타협과 공존을 모색하기 위해 편찬한 당론서이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국가의 유지 발전을 위한 정책 마련이라는 정치의 본령을 회복하려는 것에 있었으므로, 그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붕당은 타파되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이전의 당쟁을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서 독자들은 선조부터 영조대까지 진행된 조선후기 당쟁에 대해 당대인의 시각으로 정리한 가장 객관적인 내용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