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인 관조 : 수평을 넘어서는 수직적인 시선
통찰이니 성찰 또는 관조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흔히 들을 수 있지만, ‘신학적인 관조’라는 말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흔히 듣던 ‘관조’라는 말에 ‘신학적인’이라는 형용사가 더 첨가되니 희미하던 형이상학적인 세계가 보이는 듯하고, 일상 과 자연을 영원과 초월로 연결하는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게 된 다. 김완수 시인의 『미친 사랑의 포로』라는 시집의 평설을 써달 라는 부탁과 함께 보내온 시집 원고를 읽어보는 순간 나의 뇌리 에 잠재해 있던 ‘신학적인 관조’라는 말이 불현듯 상기되어 시집 평설의 한 카테고리로 설정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관조’란 일상적인 사고나 통찰 에서 암시받는 그런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시선을 사물에 내맡기거나 내버려두는 태도도 아니다. 국어사전 을 보면 관조는 주관을 떠나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라 기록돼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통찰, 관찰과 어느 정도 그 뜻이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지만, 관찰하고 나서 가만히 지 켜봄에 그치지 않는 사색하고는 엄연히 다르다.
미학에서는 미(美)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 고, 불교에서는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직감만으로, 막연한 응시나 관찰만으로, 아니면 이성적인 분석과 판단만으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영혼이 활성화되는 지평과 그 시야가 깊어 져야 하고, 그 정신과 연찬의 폭과 넓이가 확대되어야 하며, 무 엇보다 체험의 동선이 사물과 늘 잇대어져 있어야 하고, 늘 신선 하고 싱싱하게 만나야만 한다. ‘신학적 관조’란 이런 점에서 관 념적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흔적과 초월을 주워섬기거나 노닥거 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자연 속에서 신성의 심오한 의미와 흔 적을 밝고 따스하게 직관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