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가 출신 범죄자 vs 명문대 출신 엘리트 청년
성매매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은 누구인가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7월의 어느 날, 미간을 관통당한 채 발견된 두 구의 시체. 조사 결과 피해자들은 성매매에 몸담고 있으며 어린 자녀를 방임, 학대한 미혼모로 밝혀진다.
한편 프리랜서 기자 기베 미치코는 한 식품기업의 악성 클레임 사건을 취재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블랙컨슈머가 3년 동안 도시락에 이물질이 들어간 사진을 보내며 입막음의 대가로 금전을 요구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공장에 ‘세 번째 피해자를 내기 싫으면 돈을 준비하라’라는 협박문과 함께 신원불명 여성의 나체 사진과 체모 몇 가닥이 도착한다. 체모가 얼마 전 살해당한 성매매 여성의 것으로 밝혀지자 수사본부는 성매매 여성 연쇄살인사건과 식품기업 공갈협박사건 사이의 연결점을 토대로 수사를 시작하는 한편 언론, 특히 방송사는 피해자의 직업과 아동학대 사실을 숨긴 채 그들의 사연을 미담으로 포장해 보도에 열을 올린다. 그런데 방송 도중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다. ‘죽은 여자들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라, 그렇게만 한다면 돈 따위는 필요 없다.’ 마치 검거를 각오한 듯 곳곳에 심어둔 단서와 영문을 알 수 없는 전화까지, 정말로 돈을 받아낼 목적이라면 어째서 이렇게 허술한 걸까? 이 협박범의 진의는 대체 무엇일까?
피해자의 주변 조사를 거듭하던 미치코는 마침내 ‘요시자와 스에오’와 ‘하세가와 쓰바사’라는 두 청년의 이름에 다다른다. 도쿄 변두리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나 좀도둑질 및 특수절도를 일삼으며 자라온 범죄자 스에오와, 의사 부모 밑에서 태어나 창창한 앞날을 보장받은 명문대 출신의 건실한 청년 쓰바사. 범인의 정체는 일견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쓰바사의 정체는 도박빚을 갚기 위해 여학생들을 성매매 업소에 팔아넘기는 극악무도한 인간이었다. 반면 미치코는 스에오의 삶의 궤적을 파고들수록, 그 주변인을 찾아가 스에오에 대한 증언을 확보할수록 그가 정말 두 여성의 미간에 총알을 박아 넣은 악인인지 혼란을 느끼는데…….
벗어날 수 없는 빈곤과 폭력, 그 지옥 속에서
아이들은 몸을 팔고 범죄에 가담한다
미치코는 스에오와 여동생 메이 그리고 주변의 여성들이 생존해야 했던 척박하고 잔인한 환경의 진실 속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인간적이고 노골적인 폭력의 현장의 윤곽을 잡아간다.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간단한 계산도 할 줄 모르는, 안전한 가정과 기본 교육의 부재 속에 방치된 여성들은 자신을 ‘산’ 남자가 ‘돈만 추가로 쥐여주면’ 어린 딸을 남자에게 팔아넘긴다. 그렇게 자란 딸들은 다시 거리로 나가 몸을 팔고, 아비 모를 자식을 낳아 제 아이들을 학대한다. 스에오는 바로 그런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났다.
사회적, 경제적, 정서적 돌봄에서 소외된 아이들, 폭력에 노출된 채 범죄와 인접한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다시 폭력을 재생산하는 악순환의 고리. 그러나 스에오는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타고난 총명함과 성실함을 발휘해 학업에 몰두하는 한편 일곱 살 터울의 여동생의 양육자 역할을 대신하며 어머니의 빚을 갚기 위해 악행과 위법의 경계선에서 줄타기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주변의 선한 어른들은 스에오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스에오는 그 손을 잡으며 여동생만큼은 어머니의 삶을 답습하게 하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고군분투했다. 그의 삶을 알아갈수록 미치코는 물론이거니와 독자 또한 동네 어른들처럼 스에오가 인간성을 버리지 않았길 바라는 연민의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인권이 존재하는,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는 양지의 세계에 닿기 위한 스에오의 몸부림은 남매를 어디로 데려갔던 것일까. 이윽고 미치코는 수사본부가 끝끝내 잡아내지 못했던 사건의 참혹한 진상에 다다른다.
“가난을 연민하는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인가?”
선악 개념으로 단죄할 수 없는 인간의 절박한 동기,
그 끝에 도달한 자가 목도한 충격적 반전
모치즈키 료코는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 인간의 비극을 생생하고 끈질기게 묘사하면서 사회 안전망 제도의 사각지대를 예리하게 조명한다. 아무리 탈출하려 발버둥 쳐도 더 깊은 수렁으로 가라앉기만 하는 개미지옥.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어도 끝끝내 정상적인 사회 일원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또 다른 범죄를 낳는 폭력의 굴레는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시스템처럼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의 승자는 누구인가. 살아남은 자가 곧 승자라고 볼 수 있는가. 세상은 두 용의자 중 한 사람을 성매매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으로 지목하고, 미치코는 남은 한 사람을 찾아가 진실을 추궁한다. 그리고 지독한 잔열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결말로 담담히 나아간다.
《출생지, 개미지옥》의 반전은 여타 추리소설처럼 기막힌 트릭으로 독자의 예측을 엇나가는 지적 싸움의 수준을 가뿐히 넘어선다. 방대한 분량에 쌓아 올린 각 인물들의 동기와 가슴 아픈 서사가 맞물려 독자가 인물에게 가지는 일반적인 기대를 배반할 뿐만 아니라 ‘도덕과 정의, 약자에 대한 연민은 인간을 구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함께 엄청난 정서적 충격을 선사한다. 경악스러운 진실을 목도한 미치코의 마지막 ‘선택’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독자의 가슴에 남겨 놓는다.
날카로운 통찰력, 맹렬한 서사,
뛰어난 문학적 성취로 오래도록 기억될 이야기
“뚜렷한 메시지와 탄탄한 이야기로 구성된 사회파 추리소설을 기다렸다면
반드시,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다.” - 천감재(옮긴이)
저자 모치즈키 료코는 개인의 힘만으론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폭력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비극의 구체적 현장을, 마치 개미들의 생태를 연구하는 관찰자처럼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묘사한다. 응시할수록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이 들지만 그렇다고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발밑에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 독자에게 눈물을 강요하는 과장된 묘사를 철저히 배제한 채 고통을 재현하는 저자의 역량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탁월한 균형감을 발휘한다. 감정과 판단을 내려놓고 객관적인 관찰자의 태도로 촬영물에 근접하는 모치즈키 료코의 카메라는 그러나 요란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요시자와 남매와 그 주변 여성들의 삶에서 가슴 아픈 장면들을 포착한다. 숨 돌릴 틈 없이 신경을 자극하는 장면의 빠른 전환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한 전개도 없는 이 어둡고 집요한 이야기가 독자의 시선을 마지막까지 묶어둘 수 있는 까닭은 저자가 발휘하는 노련한 이야기꾼으로서의 감각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듯 다른 각자의 불행에 놓인 인물들의 입체적이고 복잡한 심리를 치우침 없이 전달하고, 사건보단 사연에 집중하며, 각 인물들의 동기를 탄탄하게 구성하여 한 명 한 명의 드라마를 엮어나가는 솜씨는 자그마한 잔재주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서사와 장면의 힘만으로 독자의 몰입을 강화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이 무섭도록 둔탁한 이야기의 중량감은 불편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출생지, 개미지옥》은 그 모든 진상을 목격한 자의 뇌리에 확실히 자리매김하여 오래도록 대체할 수 없는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