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모호하고 아름다운 수수께끼
「사라진」은 액자식 소설로, 현재 시점과 과거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한 귀족가의 무도회에서 마주한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노인. 그는 “백 살 노인인 동시에 스물두 살 청년이었고,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사연을 궁금해 하는 후작 부인에게 ‘나’는 칠십여 년 전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정적인 젊은 조각가 사라진은 오페라 극장의 배우 잠비넬라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녀를 뮤즈로 삼아 조각상을 만든다. 그의 마음을 좀처럼 받아 주지 않는 잠비넬라를 조각상 앞으로 데려와 애끓는 사랑을 고백한다. 광기와 피, 환상으로 얼룩진 비극적인 이야기는 끝나고, 작품은 다시 현재의 시점으로 이동한다. 모든 사연을 듣고 후작 부인은 저택에 걸려 있는 그림의 주인공과 노인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되고, 충격에 휩싸인다.
「사라진」은 발자크의 작품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사실주의에 천착해 시대상을 고발하는 그의 작품 세계 속에서 유독 몽환적이고 ‘현실과 유리된’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끝에서야 밝혀지는 노인의 정체를 쫓으며 읽게 되는 추리 소설의 형식을 취해 환상적인 분위기에 매력을 더한다. 「사라진」을 집필한 1830년 당시 발자크는 부친의 사망 후 인쇄업, 출판업, 금광 개발 등 이런저런 사업에 잇달아 실패해 막대한 빚을 떠안았다. 스물두 살 연상의 베르니 부인을 만나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첫사랑에 빠진 청년으로서 ‘인생을 건’ 사랑 앞에 몸을 내던지는 사라진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잠비넬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는 젊은 시절 발자크의 좌절과 고뇌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동전의 앞뒤와도 같은 인간의 양면성”과 정체성, 성 역할에 관해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통찰력을 보여 주는 주제 의식은 편협한 한계에 지평을 넓혀 준다.
의미심장한 단서들을 점점이 흩뿌리면서도 작가는 일부러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독자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간다. 그는 어둑한 겨울 풍경과 휘황찬란한 살롱, 삶의 열기와 죽음의 냉기,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흉측함, 남자와 여자, 젊음과 늙음, 자연과 문명을 대비시키며 차곡차곡 환상과 환각의 세계를 구축한다. -「작품 해설」 중에서
「샤베르 대령」, ‘나’를 되찾기 위한 전쟁
「샤베르 대령」은 역사가로서의 발자크의 면모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1810년대 루이 18세의 집권 초기, 한 법률 사무소에 추레한 옷차림의 노인이 찾아와 소송 대리인 데르빌과의 면담을 요청한다. 노인은 본인이 수년 전 아일라우 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샤베르 대령이라고 주장한다. 배우자인 페로 부인과 연락이 닿지 않으니, 그녀가 상속받은 막대한 유산을 돌려받고 예전의 삶을 되찾는 일을 도와 달라며 간곡히 부탁한다. 마침 페로 부인의 소송 대리인이기도 했던 데르빌은 노인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심사숙고하며 둘의 만남을 주선한다.
샤베르 대령은 나폴레옹의 실각 후 복고 왕정이 구축되던 혼돈과 격변의 시대를 맞이한 당시 프랑스의 ‘벼락 출세자’ 중 한 명이다. 고아원에서 태어나 오직 자신의 힘으로 나폴레옹을 따르며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하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게 된 후 추락은 출세만큼이나 빠르게 진행되어 힘겹게 쌓아 올린 부와 명예를 한순간에 모두 잃게 된다. 그의 유산을 상속받은 후 재혼으로 신분 상승의 욕망을 실현한 페로 백작 부인은 그를 철저하게 외면한다. 발자크는 꿈, 명예, 사랑뿐 아니라 ‘살아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샤베르 대령의 실존적 좌절의 과정으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마다의 이상을 향해 발버둥치던 당시 프랑스의 시대상을 기록한다. 진정한 사랑과 고결한 성품을 상실해 가는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해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
「샤베르 대령」은 잃어버린 정체성에 관한 헛된 탐구와 나폴레옹 제국이 몰락한 뒤 복고 왕정 밑에서 승승장구하는 부르주아의 위선과 이기심을 고발하는 역사적, 사회적 회화이다. -「작품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