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호빙(玉壺氷)’은 ‘옥으로 만든 병 속의 얼음’이란 뜻으로, 속세의 진구(塵垢)에 물들지 않은 채 고결한 절조를 지키면서 고상한 정취를 즐기는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명(明)나라 도목(都穆, 1458∼1525)이 한나라부터 명나라 초까지의 여러 전적 중에서 ‘고일(高逸)’한 문장이나 고사만을 가려 뽑아 편록(編錄)해 놓은 것이다.
총 72조의 문장을 시대순으로 편록했다. 채록 대상 시기로는 송(宋)대가 37조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채록 작품으로는 ≪세설신어(世說新語)≫가 16조로 가장 많다.
세속의 혼탁함과 번잡함에서 벗어나 ‘고일’한 정취와 ‘한광(閑曠)’한 생활의 즐거움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 ≪옥호빙≫은 간행된 후 명나라 말에 이르러서 ‘고아(高雅)’함을 숭상하던 당시의 사회적 기풍 속에서 여러 문인들이 ≪옥호빙≫에 대한 증보 작업을 통해 ≪빙월≫, ≪광옥호빙≫, ≪증정옥호빙≫, ≪보옥호빙≫ 등 일련의 속작을 편록해 냈다. 이렇듯 ≪옥호빙≫은, 은사(隱士)를 지향하던 명나라 말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많은 문인들이 애독하고 증보해 속작을 지음으로써, 당시 문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현존하는 ≪옥호빙≫ 판본은 명·청대 간본으로는 명천계간손여란교본(明天啓間孫如蘭校本), 명간구행본(明刊九行本), ≪속설부(續說郛)≫본 등이 있고, 조선시대 간본으로는 경진년무안현간본(庚辰年務安縣刊本)[구행십팔자본(九行十八字本)], 구행십칠자본(九行十七字本), 십행십팔자본(十行十八字本), 십행이십자본(十行二十字本), 필사본 등이 있다.
≪옥호빙≫의 국내 전래 상황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은 허균(許筠, 1569∼1618)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와 ≪한정록(閒情錄)≫에서도 보인다. 실제로 ≪한정록≫에는 ≪옥호빙≫의 고사가 총 53조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옥호빙≫을 출전으로 밝힌 고사가 18조며 다른 책을 출전으로 밝힌 고사가 35조다. ≪옥호빙≫이 언제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되었는지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경진년무안현간본이 조선 선조 13년(1580)년에 간행된 것으로 보아 그보다 훨씬 이전에 전래되어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을 것이다. 이러한 독자들의 광범위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여러 판본이 간행되고 필사본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조선 간본은 모두 전본(全本)이자 선본(善本)으로, 그 문헌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중국(대만)에 전본이 1종 1책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 비춰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옥호빙≫은 이제까지 국내외의 학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그 완전한 판본의 소재조차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옥호빙≫에 대한 저록은 명대 초횡(焦竑)의 ≪국사경적지(國史經籍志)≫와 청대 황우직(黃虞稷)의 ≪천경당서목(千頃堂書目)≫ <소설류(小說類)>에만 보이는데, 모두 “1권”이라 되어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옥호빙≫에 대한 언급은 ≪중국문언소설서목(中國文言小說書目)≫(1981)과 ≪중국문언소설총목제요(中國文言小說總目提要)≫(1996)에 보이는데, 모두 ≪속설부(續說郛)≫본만 현존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렇지만 ≪속설부≫본은 도목이 본래 편록했던 판본이 아니므로 이것은 잘못된 기술이다. 현재까지 확인한 바에 따르면, 현존하는 ≪옥호빙≫ 각본(刻本)은 국내에 4종, 대만에 3종, 일본에 1종이 남아 있는데, 모두 도목의 원각본은 아니다. 이 중에서 국내에 소장된 4종은 모두 조선시대 간행본으로, 도목의 원본 계통이라 판단되고, 대만에 소장된 3종은 그중 1종만 원본 계통이고 나머지 2종은 후인이 증보한 증보본으로 판단된다. 일본에 소장된 1종은 국내 간행본과 같은 판본으로 판단된다. 특히 국내 간행본 가운데 1종은 현존하는 ≪옥호빙≫ 판본 가운데 가장 빠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조선선조경진년무안현간본(朝鮮宣祖庚辰年務安縣刊本)을 저본으로 해 전문(全文)을 교감하고 역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