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현장 실무와 이론으로 깊이있고 쉽게 이야기하는
일본 현대 디자인사이자 일본 현대사
저자 스스로가 일본 디자인 업계 최일선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던 디자이너라는 점이다. 우치다 시게루는 현장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당사자가 아니었더라면 알기 어려운 부분까지 세세하고 깊게, 그리고 알기 쉬운 언어로 각 시대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 스스로가 통사 서술을 목표로 삼고, 각 시대별로 정치적, 국제적 배경을 설명한 뒤 각 장르별 디자인의 양상을 소개하는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객관적인 사실만을 나열하여 중립을 유지하거나 후대의 필자가 서술 대상과 어느 정도 시대적 거리를 담보하는 일반적인 역사서와는 달리, 동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한 구성원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한 시대의 대표 사례로 자신의 작품을 꼽는 데에 주저함이 없으며 개인적인 감상과 소회가 불쑥불쑥 등장하는 부분은 유명 디자이너의 회고담에 가깝기도 하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부분은 디자인‘사’라기보다는 디자인‘론’에 가깝다. 그럼에도 결코 가던 길을 잃는 법은 없이 충분히 훌륭한 통사 책으로 기능한다. 일본 디자인사라기보다, 디자인을 통해 보는 쉽고 재미있는 일본 현대사라고 해도 좋겠다. 정치와 외교 중심의 서술이 아닌,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일제’ 브랜드와 기업, 아티스트와 상업 공간이 등장하는 일본 현대사인 셈이다. 일본 ‘현대’사를 읽음으로써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편으로, 일본 ‘디자인’의 역사를 통해 한국 디자인을 되돌아보고 점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을 보면 20년 후의 한국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이제는 옛말이 됐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는 대부분 그 말에 해당됐던 시절이다. 그러니 굳이 역자가 강조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일본과 한국을 비교하며 읽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세대에 따라서는 익숙함과 향수를 느끼는 독자분들도 있을 것이다.
1943년에 태어난 저자가 이 책을 썼을 때는 칠순에 가까운 나이였다. 무엇이 노년의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했을까.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을 이룩하기까지, 일본 국민은 근면했고 악착같았다. 물론 디자이너들도 많은 공헌을 했다. 성장지상주의에 있었던, 그리고 실제로 많은 성취를 거뒀던 일본의 디자인을 돌아보며, 저자는 글로벌과 로컬, 환경과 인간을 말한다. 우치다가 이 책을 탈고한 직후에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다. 쓰나미는 많은 사람들의 재산과 목숨을 앗아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원전을 파괴하여 방사능 오염으로 일본뿐 아니라 이웃나라까지 긴장시켰다. 어떤 학자들은 메이지유신 이래 생산 제일, 성장 제일이라는 일본의 150년 행보가 생명 경시를 동반했고, 그런 끝에 후쿠시마의 파국을 맞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이 노령의 저자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책의 마지막 부분을 디자인‘사’가 아닌 디자인‘론’으로 끝맺게 했으리라.
비록 일본 디자인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의견에 100% 찬동하지는 않더라도, 한 시대를 대표한 디자이너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목소리를 전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라 믿는다.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여전히 원전 오염수 문제는 해결될 길이 요원한데, 그 문제에는 신경 쓸 여유도 없이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재난을 현재진행형으로 마주하고 있다. 근대편 저자인 가시와기 히로시의 말을 빌리자면, 디자인은 쓰는 사람들의 감각과 사고의 변화에 작용하며, 따라서 디자인은 실제로 우리 삶을 규율하며 이끌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디자인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비단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사용자인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 볼 문제다.
날카로운 통찰력, 그리고 인격이 느껴지는 각종 에피소드 외에, 책이 담고 있는 방대한 자료와 정보를 통해 디자이너이자 평론가로서의 저자가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시대와 맞서 왔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